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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시 죽산 극단 무천

중앙일보

입력

꿈많은 여고생이 있었다. 외딴 섬을 통째로 사들여 번듯한 예술촌을 건설하려고 했다. 백사장엔 음악당, 미술관을 짓고 섬 중앙엔 공연장을 세우려고 했다. 간단한 설계도도 직접 그렸다.

그리고 26년. 그 소녀는 이제 중견 연극인으로 성장했다. 비록 바닷가는 아니고, 또 아직은 연극만을 위한 공간이지만 어릴 적 꿈을 차곡차곡 채워가고 있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에 자리한 연출가 김아라(44) 의 무천 극단이 그 곳이다.

지난달 마지막 일요일 넓게 펼쳐진 용설저수지 맞은 편. 축제극단 무천이란 간판이 기자를 맞이한다. 입구 양쪽엔 백두대장군과 한라여장군 장승이 서 있고 왼쪽엔 원형 야외극장이 보인다.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아담한 2층 흙벽돌집과 마주친다. 연극과 놀이의 총체적 만남을 추구하는 무천의 보금자리다.

발길을 돌려 저수지 건너편 용설리 마을회관으로 갔다. 무천 단원들이 연습장으로 사용하는 회관 지하가 왁자지껄하다. 광주 민주항쟁 20돌을 기념해 10일 국립극장 대극장에 오를 '화제?' '봄날' (임철우 원작) 의 출연진이 단합대회를 가졌다. 서울·광주의 26개 극단에서 활동하는 배우 50여명이 막걸리와 두부김치를 나누며 우의를 다졌다. '봄날' 에는 무천 단원도 10여명 참여했다.
연출자 김아라도 흥에 겨워 술잔을 돌렸다.

"지난 두 달을 땀 흘렸지요. 진압군의 시각에서 광주항쟁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했어요. 재생, 환희의 계절인 봄에 20년 전의 비극을 반추하게 돼 의미가 커요. " 그렇게 무천 식구들은 지난 겨울을 '봄날' 과 함께 보냈다. 공연이 끝나면 다시 무천 특유의 워크숍에 들어간다. 오는 8월 원형극장에서 선보일 대형 야외음악극 '맥베스' 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무천은 1997년부터 해마다 대형작품 '오이디푸스 3부작' '인간 리어' '햄릿 프로젝트' 를 발표하며 문화 '탈(脫) 서울' 의 전초(前哨) 에 서 왔다.

김아라가 죽산행을 결심한 때는 지난 89년. 아파트를 담보로 잡히고 대출받은 돈으로 무작정 땅부터 구입했다. 이후 폐가(廢家) 를 개조하고, 마을회관을 임대해 작품을 준비하다가 97년 초엔 아예 단원과 함께 정착했다. 봄에는 텃밭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채소를 뽑아 먹으며 동고동락하는 공동체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무엇보다 작업에 몰두할 수 있어 좋아요.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이 없죠. 게다가 놀면서 연습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쉬고 싶을 때 쉬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연극(play) 이란 그런 것 아닙니까. 기본적으로 '놀자 판' 입니다. 그래야 에너지가 생기지요. " 그는 연극의 축제성을 살려내려면 '역시 '자연만한 환경이 없다고 확신한다. 잿빛 서울에선 활달한 생명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양식 이성에 눌려 상실한 원초적 신명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정착 초기엔 어려움도 많았으나 지금은 차츰차츰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다. IMF 사태로 대학로가 신음할 때도 죽산 야외극장엔 관객들이 꾸준히 찾아왔다. 안성시도 각종 공연을 음양(陰陽) 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내년엔 극단 인근 숲속에 1백석 규모의 소극장도 지어줄 계획이다. 극단측은 답례 차원에서 5월쯤에 인근의 안성.이천.용인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작은 축제를 기획하고 있다.

"10년 뒤에는 음악, 미술, 연극이 함께 하는 문화공간을 세울 생각입니다. 창작과 교육이 동시에 진행되는 그런 곳이 될 겁니다. 돈이 있느냐구요. 물론 없지요. 일단 저지르고 보면 무언가 나오겠지요. " 자신만만한 태도가 문화 전사를 연상케 한다. 사람의 꿈은 그렇게 익어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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