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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부패보다 무서운 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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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문창극
대기자

개인의 일탈된 행동을 우리는 스캔들이라고 부른다. 어느 사회나 스캔들은 있기 마련이다. 잘나가던 정치인이 하루 아침에 섹스 스캔들로 무너지고, 촉망받던 공무원이 부패 사건으로 장래를 망친다. 스캔들은 사회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다. 그러나 “나라가 온통 썩은 것처럼 보인다”고 대통령이 말할 정도가 됐다면 우리의 부패 문제는 스캔들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요, 문화의 문제다. 우리 부패의 특징은 권력과 결부돼 나타나고 있다. 일반 서민이 부패한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진 사람들이 부패한 것이다.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이 국가 권력을 부당하게 이용해 치부하고 있다. 왜 공무원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려고 애를 쓰는가?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싶어서인가? 권력의 대가로 떵떵거리며 살고 싶어서인가? 권력이 부패한 나라에서 보통사람들은 힘이 빠진다. 일할 의욕을 잃게 된다.

 조선 말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을 말하라면 부패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사고팔고, 산 사람은 그 돈을 뽑기 위해 끊임없이 백성을 수탈했다. 탐관오리들은 어느 집에 쌀말이라도 남아 있으면 이것을 빼앗으려고 권력을 이용해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백성들은 일할 의욕을 잃었고 게을러졌다. 재산 없는 것이 차라리 편했기 때문이다. 부패가 구조화되면 사람들의 심성이 이렇게 바뀌는 것이다. 결국 조선은 망했다. 그나마 부패는 냄새가 나고 썩는 부위가 보이기 때문에 의지 여하에 따라서는 고칠 수가 있다. 썩은 곳을 도려내고 윗사람부터 솔선수범하면 병을 치유할 수도 있다.

 부패는 ‘나쁜 것’이라고 누구나 금방 인정한다. 그래서 고칠 수 있다. 문제는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애매할 경우다. 아니 겉보기에 더 인간적이고 좋아 보일 때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그것은 부패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바로 ‘공짜 병’이다. 사회복지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사람들은 노력한 것보다 더 큰 대가를 바라고, 심해지면 일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모든 걸 국가가 대신해 주겠다는데 누가 일하려 하겠는가. 기생(寄生)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조선 말에는 탐관오리들 때문에 백성들이 근로의욕을 상실했다. 민주주의 시대인 지금, 잘못된 정치가 우리의 독립심과 근로의욕을 빼앗고 있다. 조선은 매관매직으로 부패했는데 지금은 표를 노린 민주주의가 국민의 정신을 부패시킨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생색은 정치인들이 내며 나라 장래를 망치고 있다. 나라를 망치는 대가로 정권을 잡겠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외면하자는 말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밥 한 끼 먹이자’는 일에 인색하자는 것도 아니다. 복지가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니다. 복지를 하되 능력 안에서 하자는 말이다. 수입은 얼마이고 쓸 돈은 얼마인가를 가늠해 나라의 능력에 맞게 복지를 설계해야 한다. 독일이나 북구는 그 설계를 잘한 반면 그리스나 스페인 등은 설계가 잘못되어 나라가 부도 지경에 이른 것이다. 반값 등록금에 앞서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공부가 좋아 열심히 할 사람만 대학에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른 길로 가야 한다. 독일에서는 아무나 대학에 가지 않는다. 일찍부터 직업학교로 갈 사람과 대학에 갈 사람을 나눈다. 사람의 재능은 여러 가지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대학은 누구나 가는 곳이 아니라고 먼저 말해야 한다. 그러나 표 때문에 그런 말은 아예 꺼내지 않는다. 그들이 해야 할 말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좋은 일자리가 많은 나라를 만들겠다” 는 것이어야 한다. 세상에 변치 않는 진리가 있다.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많은 나라일수록 번영하고, 일은 하지 않고 대가만 바라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쇠퇴한다. 우리나라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근로정신, 자립정신 속에서 열심히 살아왔다. 이제야 그 열매를 좀 맛보는가 싶은데 벌써 그 정신을 버리려 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민주주의를 도입할 초기에 일정한 재산이 있는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주었다. 이는 무산자가 선거를 통해 유산자의 재산을 빼앗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 아니다. 야심가들이 무산자들을 돈으로 매수할 경우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정치인들과 비슷한 짓을 할까봐서다. 우리 민주주의는 지금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끝없는 개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책임보다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는 층과 자기 책임은 안 하고 더 많은 공짜를 바라는 층이다. 이런 공격으로부터 사회의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계층이 있어야 나라가 산다. 이 계층을 중산층이라 불러도 좋고, 교육받은 합리적 계층이라고 불러도 좋다. 이 각성된 계층만이 탐욕스러운 자들을 경계하고, 공짜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 보통의 시민들은 이 길을 걷자. 그래서 나라를 살리자.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