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물고기는 머리부터 썩는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집사람이 10년째 여러 대학을 오가며 시간강사를 한다. 가끔씩 학생 수준을 품평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S대 강의는 긴장해야 한다. 수도권 I대는 절반쯤 강의를 따라오는 분위기고….” 그의 친구가 맡은 지방의 신설 D대학의 수준은 놀라울 정도다. “교양영어 강의는 100% 불가능하다. 아예 중학생 수준의 기본 영문법부터 가르친다”는 것이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4년을 때우는 학생들이 불쌍하다. 정치권은 이런 대학까지 “2학기 등록금 고지서부터 반값이 찍히도록 하겠다”고 야단이다.

 서울메트로는 안정된 공기업이다. 토익 점수 900점 이상의 명문대 출신이 구름같이 몰려온다. 하지만 대개 지하철역 창구에서 표 파는 단순업무부터 맡는다. 보람과 만족은 기대하기 어렵다. 자원 배분의 왜곡을 넘어 개인적 불행이자 국가적 재앙이다. 한 전직 서울메트로 사장은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일정 직군엔 고졸 출신만 채용하는 역(逆) 학력제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반값 등록금보다 정부와 기업의 채용방식부터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공고 출신 채용을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덕분에 경북 경주의 신라공고는 삼성에 2명의 학생이 입사했다. 전략적 제휴를 맺은 현대중공업에도 4명이 들어갔다. 덩달아 입학경쟁률은 급등했다. 이 학교 손수혁 교장은 “하루 먼저 원서를 마감한 뒤 성적이 낮은 학생들은 다른 학교 쪽으로 유도한다”고 말했다. IBK기업은행이 올 상반기부터 특성화고(高) 출신의 창구 여직원을 뽑기 시작한 것도 의미 있는 변화다. 일부 공기업들이 고졸 출신을 우선 채용하는 것도 반가운 현상이다.

 요즘 반값 등록금에 집착하는 정치권을 보면 문득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궁금해진다. 부담 없는 대학생활이 중요한가? 아니면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일정한 능력을 갖추면 잘살 수 있는 사회인가? 만약 후자라면 발길을 돌려야 한다. 반값 등록금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많다. 기업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졸 출신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잡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게 우선이다. 무늬만 대학들은 싹 정리하고, 대학 재정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도 시급하다. 솔직히 지금 촛불은 대학생보다 상대적으로 차별 받는 마이스터고나 특성화고 학생이 들어야 맞다.

 대공황의 절정기인 1933년 초 미국은 분노가 지배했다. 증오에 찬 군중의 눈치를 살피며 포퓰리즘 광풍이 불었다. 갓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기자들이 물었다. “이 혼란을 수습 못하면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 되겠죠?”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실패하면 미국의 마지막 대통령이 될 것이오.” 루스벨트는 대중의 맹목적 분노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중과 늘 정중한 거리를 유지했다. 꾸준한 설득을 통해 포퓰리즘의 압력을 조금씩 빼놓는 지도자의 덕목을 보였다.

 반면 한국 정치권은 대중 속에 파묻혀 버린 느낌이다. 아무리 총선과 대선이 코앞이라 해도 도가 지나치다. 선진국보다 비싼 등록금만 강조하고, 대학진학률은 그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은 외면한다. 어차피 한국은 공공부문과 대기업을 합쳐 대졸 출신에게 제공할 양질의 일자리는 15만 개가 고작이다. 매년 대졸자가 60만 명인 상황에서 반값 등록금을 강행하면 그 결과는 뻔하다. 학력 인플레만 부풀리고, 전문계고의 대학 진학까지 부추길 뿐이다.

 ‘물고기는 머리부터 썩는다’는 말이 있다. 반값 등록금 시위보다 그들의 목소리에 춤추는 정치권이 훨씬 불길하다. 세계 정치사를 보면 포퓰리즘은 대체로 패자(敗者)들의 도피처였다. 우리 정치권은 여야 없이, 사회의 머리부터 주술(呪術)에 빠진 느낌이다. 합리적인 지적조차 ‘무상과 반값’이라는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모독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오히려 “정부 재정으로 반값 등록금은 불가능하다”는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의 소신이 돋보인다. 이제 분노한 대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차분히 대안을 마련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미국의 루스벨트처럼.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