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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블랙박스의 해독 그 이후

중앙일보

입력

그동안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글을 여러번 썼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별반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주로 이 사이트에 올린 글들이 문제가 되었는데 한번은 반론을 그대로 소개하기도 했다. 〈표절사건 블랙박스 해독하기〉에는 다른 어떤 글보다 빠른 피드백이 와 인상적이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글은 2월 17일에 온 메일이다.

'art boy'(〈ichongo@hotmail.com〉)라는 멋진, 예술적 닉네임을 지닌 분의 메일은 먼저 '예고편은 영화계에서 하찮게 여겨지는 일'이라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아! 물론 그전에 미숙아의 무식함과 이기심을 꾸짖는 글도 있지만) 예고제작은 "돈도 받지 않고 조감독이 대강 편집하거나 임권택 감독의 춘향전 같은 경운 대학을 막 졸업하고 영화경험이 처음이었던 사람이 예고를 제작할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그나마 CG를 입혀 제작한 예고에 칭찬을 못해줄 망정 나름대로의 시도 아님 패러디의 의도로 사용한 것을 표절이라고 정의 한다면... 영상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다 굶어 죽으란" 이야기로 미숙아의 글을 비판했다.

게다가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이라는 애니메이션이 불법으로 엄청나게 유통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예고편을 제작한 사람이 미치지 않았다면 '표절'의 의도로 옮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글을 보냈다.

그렇구나. 정말 그렇구나. 영화계에서는 예고편이 아무 중요성 없이 조감독이 대강 만들거나 영화경험이 처음이었던 사람이 제작하는 '하찮은 것'이구나. 그렇기 때문에 〈주노명 베이커리 예고편〉 같은 경우는 예고편 만든이의 변명처럼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의 음악과 영상 전개의 중요 아이템을 나름대로 영화에 옮겨보려는 시도였거나 패러디였구나. 역시 나는 예술 소년의 지적처럼 융통성이 없고 무식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구나.

"영화 자체의 내용이나 표현에 사용한 것도 아니고... 영화인들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예고에 그런 반응을 보이다니... 네티즌들은 이해합니다. 그들은 민감하고 대부분 일본 에니에 막연한 애정을 갖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평론가이고 비주얼을 다루는 분야에서 먹고 살면서 그렇게 답답하게 막혀있다니.. 참 한심하군요. 뭐 원칙론, 표절에 대해 말하려면 하지마요. 시간낭비니까요. 롱테이크와 딥포커스를 쓰면 시민케인의 표절이라고 외칠 당신 같이 영상에 무식한 사람은 일본 에니나 보며 자위나 하고 있겠죠. 우리나라 사람은 늘 표절만해... 왜 이런 걸 못만들지... ? 명백한 표절은 당신이 말했던 R4같은 경우인 거고 이 예고는 정말.. 그 의도가 패러디인 겁니다. 그냥 보면 모르겠어요? 참고로 난 이 예고와 전혀 상관없는 그냥 영상을 공부하는 학생이고. 영화판에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정보는 늘 듣는 것이고..."

그냥 읽어버리고 넘어가면 되는 개인 메일을 공개하는 이유는 한가지다. 적어도 이 메일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 사람 이상은 되리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생각이 아주 보편적일 수 있다는 우려때문이다. 이 메일은 원칙을 들먹이지 말고 현실을 보라고 이야기한다. 아주 그럴싸한 이야기다. 우리나라는 현실이 원칙을 대신하는 나라다. 지저분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원칙이 없는 현실이 얼마나 우리를 망가뜨리는지 잘 알고 있다. 원칙은 막연한 추상이 아니다. 원칙은 그야말로 원칙(原則), 근원의 법칙이다. 근원이 되는 법칙을 무시하고 처리하는 일은 결국 참혹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주노명 베이커리 예고편〉에 문제를 제기한 네티즌들은 그저 일본 애니메이션에 막연한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원칙을 바로 세우고 싶은 사람들이다. 하찮은 예고편에 흥분하는 것은 그것이 영화판에서 하찮게 여겨진다해도 결국 그 예고편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예고편을 만든이가 연습삼아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에서 보여준 영상의 특징을 실사영상으로 옮겨본 것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예고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예고편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명백하게, 너무나 명백하게 그 예고편에는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에 나온 음악이 '무단 도용'되었으며, 특정한 영상 표현이 옮겨져 있었다.

나는 '영화인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예고를 보고 흥분해서 글을 쓴 바보같은 '만화'평론가다. 그러나 또 어느 하찮은 영상이라도, 그것이 대중적으로 공개되고 문제의 여지가 있다면 발언할 것이다.

다음은 저에게 메일을 주신 예술 소년님께 드리는 글입니다.

"어디 내 말이 틀렸으면 논쟁해봅시다. 아마 당신보다 내가 한 게임이나 에니나 영화가 훨씬 많을테니까 말이요. 난 자신있습니다." 라고 하셨지요.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예술 소년님과 논쟁하지 않으렵니다. 제가 한 게임이나 에니나 영화가 남보다 훨씬 적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저는 융통성 없이 원칙만 강요하는 사람이고 또 답답하게 막혀있는 사람이니까 아마 타협점이 나올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는 앞으로 계속 이야기하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융통성 없으며 무식하고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해 이기적인 마음을 갖고 있으며 원칙만 강요하는 사람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좋은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사실은 원칙보다는 타협에 능숙한 사회에 물들은 노회한 인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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