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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야 그리나요, 느낌으로도 그리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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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테이프를 접어 만든 학교 지도를 한 맹학교 학생이 손으로 만지며 감상하고 있다. [‘우리들의 눈’ 제공]

“지팡이가 땅을 찍는 느낌으로 구멍을 뽕뽕 뚫어봐.”

 조각가 김미경(43)씨의 말에 앞 못 보는 아이들은 볼펜 끝으로 도화지에 구멍을 내며 즐거워했다. “너희가 평소 다니는, 몸으로 체험한 길을 왼손이 왼발이 되고, 오른손이 오른발이 돼 걸어 다니는 느낌으로 그려보자”는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양손에 크레용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듯 선을 그었다. 서울 수유동 한빛맹학교 중등부 학생들의 ‘우리들의 눈’ 워크숍 장면이다.

 ‘우리들의 눈’은 시각장애 아동들과 미술가들의 미술활동 프로젝트다. 한국시각장애인예술협회에서 주관, 올해로 15년을 맞았다. 예술가·특수교육가 등 회원 20여 명이 맹학교 아동·청소년 100여 명에게 미술을 가르친다. 보는 방법의 다양함을 나누고, 표현 욕구를 발휘토록 하는 게 목표다. 2007년 서울 화동에 ‘우리들의 눈 갤러리’도 열었다.

 ◆미술은 오감(五感)으로=보는 장르인 미술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이 고개를 갸웃거릴 문제다. ‘우리들의 눈’ 팀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드시 시력이 있어야만 보는 게 아니다. 가령, 도화지에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을 손끝으로 만져 인식할 수도 있다. 눈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일반인의 무뎌진 손끝은 느끼기 어려운 미세한 질감이다. 미술은 보는 것만이 아니라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다.

 사진 수업도 있다. 김미경씨는 “꼭 보는 것만 찍는 게 아니다. 기억·냄새·소리·촉감을 찍을 수도 있다. ‘울 엄마가 여기 찾아왔던 기억’ ‘빵 냄새’ ‘친구의 갓 깎은 까칠한 머리’ 말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라고 말했다.

 우리들의 눈 갤러리에서 ‘길, 길동무’라는 이색 전시가 열리고 있다. ‘오감지도’라는 주제로 한빛맹학교에서 진행했던 그림 수업 발표전이다. 중등2반 건열이는 경쾌하게 뚝뚝 끊기는 선을 그린 다음, 그 아래에 길게 늘인 선을 그려 넣고 “교문에서 기숙사로 올 때는 배고파서 빨리 달려오고, 배불러서 돌아갈 때는 천천히 다니는 길입니다”라고 설명했다.

 ◆동심(童心)의 교집합=김미경씨는 갤러리 인근 재동초등 학생과도 동네 지도 그리기를 진행했다. 아이들은 ‘죽음의 계단’이라고 자기들끼리 이름 붙인 88개의 가파른 계단을 오른 뒤 디자인 하는 어른들이 세워 놓은 ‘하늘 맑은 길’이라는 표지판에 의아해했고, ‘귀신 나오는 집’으로 소문난 집을 지나면서는 몸서리쳤다. 그리고 이 모든 느낌을 종이에 크레용 선으로 옮겼다.

 그림 속에는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 하는 차이보다 동심이라는 같음이 더 부각된다. 각자가 그린 지도는 제 몸이 기억하는 시공간을 평면에 옮겨 놓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편견을 걷으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이 보인다. 7월 21일까지. 02-733-1996. 무료.

권근영 기자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서양화가인 엄정순(50) 시각장애인예술협회장이 1997년 충주성모학교의 시각장애아들을 대상으로 미술 수업을 진행하면서 시작했다. 그는 “미술인으로서 늘 갖고 있던 ‘보는 것’에 대한 의문이 학생들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해소될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삼성문화재단·정인욱복지재단·세계패션협회한국지부(FGI) 등 단체 및 개인들의 후원으로 꾸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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