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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304> 마르틴 루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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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2017년이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입니다.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의 외벽에 붙였던 루터의 대자보가 촉발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상당히 부패했고, 그 반작용으로 개신교가 등장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에도 큰 약이 됐습니다. “예수로 돌아가자, 성서로 돌아가자”는 외침으로 인해 가톨릭 역시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역사적 계기가 됐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마르틴 루터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백성호 기자

5년 전이었습니다. 독일은 통독 후의 경제적 후유증으로 국민의 사기가 저하돼 있었죠. 물가가 오르고 살기가 팍팍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시 경제지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고민 끝에 묘안을 냈습니다. 독일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뽑아서 용기를 불어넣자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물음은 이랬습니다. “세계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독일인은 누구인가?”

1위에 오른 인물은 괴테도, 베토벤도, 헤겔도, 히틀러도 아니었습니다. 중세 때 종교개혁을 일으킨 주인공 마르틴 루터(1483~1546)였습니다.

 
루터의 벼락 체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예수로 돌아가자. 말씀으로 돌아가자.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그리스도교의 본질 회복을 주창했다.

루터는 ‘광부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있었다. 그래서 루터를 학교에 보냈다. 당시에는 신학과 철학, 법학과 의학이 학문의 중추였다. 루터는 법률가가 되고자 했다. 그건 아버지의 희망이기도 했다.

방학 때였다. 고향에 갔다가 학교로 돌아가던 루터는 평생 잊지 못할 체험을 했다.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지고, 돌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졌다. 그리고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루터는 땅에 바짝 엎드렸다. 그리고 공포에 떨었다. 루터는 기도를 시작했다. 목숨을 걸고 갱도 속으로 들어가는 광부들의 수호성인인 성 안나를 향해 맹세했다. “제가 목숨을 건지고 살아난다면 수도자가 되겠습니다.”

어쩌면 루터의 내면은 이미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신학교는 지금의 대학 같은 교육기관이었다. 그래서 수도자를 꿈꾸는 이가 아니어도 수도원에서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루터 역시 수도원에서 공부를 하며 ‘수도자의 길’에 대해 숱하게 고민을 했을지도 모른다.

벼락 체험의 핵심은 ‘두려움’이다. 우리는 늘 ‘잘난 맛’에 산다. 나의 지식, 나의 철학, 나의 관점, 나의 고집, 나의 명예 등 내가 잘난 맛에 산다. 그러한 ‘나’는 너무나 강고해 좀체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벼락 앞에 서면 달라진다. 죽음 앞에 서면 달라진다. 그 앞에서 그 ‘잘난 나’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벼락 체험은 루터에게 ‘수도자로서 내딛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자신의 내면을 향해 내딛는 삶의 첫걸음 말이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보면 사도 바울도 그런 벼락을 맞았다.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말에서 떨어진 바울은 눈이 멀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암흑 속에, 두려움 속에 빠진 것이다. 루터도 그런 두려움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봤을 터다. 그리고 수도자가 됐다.

그게 끝은 아니었다. 루터의 결심만으로 모든 게 마무리되진 않았다. 루터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그는 아들이 법률가가 돼서 집안을 일으키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학교를 열심히 잘 다니던 루터가 갑자기 “수도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일을 두고 루터는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아버지도 루터의 결심을 꺾진 못했다.

루터의 생가가 있는 독일의 아이슬레벤을 찾았다. 골목을 몇 번씩 돌았더니 루터 생가 기념관이 나타났다. 안에는 루터 당시의 물건과 성경, 그와 관련한 일화를 소재로 그린 그림 등이 전시돼 있었다.

수도원 시절, 루터의 화두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

루터가 머물던 수도원은 어땠을까. 수도자 시절의 루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아이슬레벤에서 에어푸르트로 갔다. 그곳에 아우구스투스(어거스틴) 수도원이 있었다. 고즈넉한 마을에 수도원이 있었다. 수도원 안에 성당도 있고, 수사들이 머무르는 숙소도 있었다. 지금도 그곳은 수도원으로 쓰이고 있었다.

중세 사람들이 믿던 하느님(하나님)은 ‘벌 주시는 하느님’이었다. 신학도 마찬가지였다. ‘벌 주는 신학’이었다. 선과 악의 이분법이 확연하게 적용되고, 그에 따른 죄와 벌도 강고하게 적용됐다.

사제가 된 루터도 ‘벌 주는 하느님, 벌 주는 신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루터는 고해성사를 본 뒤 계단을 내려가다가 금세 되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다시 고해성사를 봤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마음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고해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도 마찬가지였다. 루터는 또 돌아와 고해성사를 봤다. “그 사이에 또 죄를 지었습니다.”

그만큼 루터는 철저하고자 했다. 죄와 구원의 문제를 풀기 위해 그는 세세하고, 꼼꼼하고, 철두철미하게 수도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 일화는 그만큼 루터가 ‘죄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중세의 수도원에서 루터는 ‘죄와 구원’을 자신의 화두로 안고 있었던 것이다.

루터의 탑 체험, 루터의 고백

독일 아이제나흐 바르텐부르크 성의 다락방에 숨어서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루터는 똑똑했다. 특유의 지성과 종교적 감수성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됐다. 거기서 ‘시편’과 ‘로마서’를 강의했다. 그의 강의실에는 늘 학생들이 빼곡했다. 루터는 ‘시편’과 ‘로마서’를 깊이 들여다보며 ‘벌 주는 하느님’을 넘어섰다. 그리고 ‘사랑의 하느님’을 만났다. 루터의 영성에는 드라마틱한 순간이 있다. 사람들은 그걸 ‘탑의 체험’이라고 부른다. 비텐베르크에서 루터가 머물던 수도원의 탑이 있는 공간에서 루터가 아주 특별한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 수도원을 찾아갔다. 지금은 루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었다. 루터가 ‘탑의 체험’을 한 공간은 사실 화장실이었다. 강의 준비를 하다가 루터는 수도원 탑 부분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참이었다. 그때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미워했던 로마서 1장 17절(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된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산다’고 기록된 바와 같다)이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 됐다. 내게 천국의 문이 됐다.” 그건 루터의 고백이었다.

다마스쿠스로 가다 말에서 떨어져 눈이 먼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고 고백했다. 그건 바울의 고백이었다. 그런데 루터는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했다. 믿음의 순간, 그게 대체 어떤 순간일까. 중세에도 숱한 이들이 교회에 나가고, 헌금을 건네고, 기도를 하고, 하나님을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가 고백한 ‘믿음의 순간’은 그런 순간이 아니었다. 그건 그리스도의 생명에 처음 목을 축이는 이들이 건네는 고백의 순간이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과 루터의 고백은 통한다. 그러니 루터가 말했던 ‘믿음의 순간’은 바로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는 순간’이다. 그때야 우리는 의로운 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산다”는 성경 말씀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 루터 역시 그런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루터가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 됐다. 내게 천국의 문이 됐다”고 고백하긴 힘들기 때문이다. ‘벌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을 깨닫고서 루터는 무엇이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는가를 깊이 깨달았던 것이다.

루터의 외침, 종교개혁의 불씨

사실 루터는 투사형이 아니었다. 그는 마음이 무척 여린 편이었다. 지금도 독일 신학자들은 “루터는 심약한 성격이었다”고 평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와중에 루터가 보여준 결단과 지향은 달랐다. 종종 그는 목숨을 내놓고 ‘루터의 목소리’를 냈다. 그런 힘의 바탕이 바로 ‘탑의 체험’에 있었다.

당시 비텐베르크에서는 면죄부(가톨릭에선 ‘면벌부’란 용어를 씀. 죄를 면하는 게 아니라 죄에 대한 벌을 면해 준다는 뜻)가 판매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웃 도시에서는 면죄부가 팔렸다. 대성당 건축 등을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자금의 조달을 위해 당시에는 면죄부가 많이 팔렸다. 비텐베르크 사람들도 이웃 도시로 가서 면죄부를 사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면죄부를 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루터는 이를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다. 그래서 “신학적인 토론이나 해보자”는 생각에서 ‘95개 논제’를 교회 외벽에 써 붙였다. 일종의 대자보였다. 당시 유럽에선 인쇄술 혁명이 막 대두될 때였다. 루터의 논제는 작은 책자로 만들어져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파장이 산불처럼 커졌다. ‘95개 논제’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은 1517년부터 5년간 계속됐다. 가톨릭 사제였던 루터는 결국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루터는 파문칙서를 비텐베르크의 참나무 아래서 지지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태워 버렸다. 지금도 그곳에 ‘루터의 참나무’가 서 있다.

이후 루터는 선두에 서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당시 성경은 라틴어였다. 루터는 라틴어로 기록된 구약과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일반 교인들도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말이다. 결국 “예수로 돌아가자, 말씀으로 돌아가자,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루터의 외침을 촉발제로 유럽은 신교와 구교와 전쟁을 거친 뒤 종교개혁의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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