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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치유를 얘기하는 선양 소주 회장 조웅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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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가무(歌舞)와 음주(飮酒)’ 사업으로 벌떡 일어선 사내가 있다. 돈도 꽤 벌었다. 성공한 남자의 다음 여정은 뭘까. 바로 ‘휴식(休息)’이다. 노래 부르고 술 마셨다면, 쉬어야 한다는 이치다. 그래서 대전시 대덕구 계족산에 ‘황톳길’을 깔았다. 어설픈 산책길이 아니다. 장장 13㎞에 이르는 명소다. 입장료 받으려고 벌인 일은 아니다. 치유를 얘기하는 소주회사 주인. 그 돈키호테 같은 주인공은 선양의 조웅래(52) 회장이다.

●황톳길이 전국구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계족산은 닭발이란 뜻이죠. 해발 423m 높이인데 350m 중턱을 한 바퀴 도는 길이 있어요. 폭이 5m인데 거기에 흙을 깔았어요. 길이만 13㎞ 정도 됩니다. 전북 김제와 충남 태안에서 황토를 공수했지요. 처음엔 ‘맨발 마라톤’ 대회로 화제였는데 지금은 신 벗고 천천히 걷는 사람이 많아요. KTX 타고 대전역에서 내리면 25분 걸리니 접근성도 좋지요.”

●맨발로 걷는 황톳길이라니. 뜬금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처음에 아이디어를 냈을 때 회사 임직원을 비롯해 다들 말렸죠. ‘누가 맨발로 걷느냐’고요. 원래 돌멩이투성이인 길이었으니 그럴밖에요. 또 ‘비 오면 흙 다 쓸려간다’는 비아냥도 나왔어요. 보통 신발 벗기를 꺼리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남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또 다칠까 봐 그렇죠. 하지만 전 폭발적 호응이 있을 것으로 확신했어요.”

●어떤 계기로요.

“제가 직접 체험했으니까요. 2006년 4월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산행 모임이 있었어요. 여자들이 하이힐을 신고 왔더라고요. 그때 맨발로 걸었죠. 이게 환상적인 거예요, 글쎄. 집에 오니 다리는 아픈데 기분이 가벼우면서, 몸이 후끈거리고. 다리 근육엔 지렁이가 기어 가는 것 같은 묘한 쾌감이 느껴지더라고요. 그 뒤로 맨발 마라톤을 해봤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결심했죠. ‘여러 사람이 공유하게 해보자’고요. 제 주특기가 대중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거든요.”

조웅래 회장과의 인터뷰는 황톳길을 3시간가량 걸으며 진행됐다. 걷기 전엔 흙가루가 뽀얗게 뿌려져 있는 그런 길을 연상했다. 그러나 실제 황톳길은 찰떡 같은 느낌이었다. 쫀득쫀득, 푹신하게 밟히는 색다른 체험이었다. 그동안 황톳길 조성에 들어간 돈은 25억원이다.

●황톳길을 키운 수완이 궁금합니다.

“오너가 추진하는 일이니 아무튼 모두 따라왔습니다. 2006년 가을 첫 행사로 ‘마사이 마라톤’을 열었죠. 마사이족(族)이 육식을 많이 해요. 그런데 콜레스테롤 수치는 서양인 평균의 3분의 1입니다. 많이 걸어서 건강한 거죠. 그런 이미지를 차용해서 대회를 개최했어요. 13㎞ 맨발로 뛰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다들 표정이 너무 좋은 겁니다. 이듬해부턴 봄에 대회를 치렀죠. 그 뒤로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5월 중순에 치러진 올해 6회째 대회엔 1만2000명이 참석해 마라톤과 걷기를 즐겼다. 10~20대가 절반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외국 손님들도 37개국에서 1000명이 왔다. 맨발 마라톤은 세계적으로 유일한 행사다.

●대회 때 ‘에코 힐링’이란 개념을 내걸던데요.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자는 철학입니다. 매달 둘째 주 일요일에 맨발 걷기 행사를 치러요. 그냥 헤어지면 섭섭하니 숲속 음악회도 열고요. 책을 읽거나 누구 얘길 듣고 정립한 개념은 아닙니다. 제가 맨발로 걸으며 체득한 거죠. 사람들이 걸으며 행복에 빠진 모습을 보고 ‘치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황토가 몸에 얼마나 좋습니까.

“발엔 26개 뼈와 100여 개 근육이 있어요. 그래서 제2의 심장으로 불리죠. 걸으며 경혈을 자극하니 혈액순환 잘되고 좋지요. 저도 꾸준히 걸으니 일단 주량이 늘고요, 하하하, 잠이 잘 와요. 소변이 잘 나오고 혈색도 좋다는 소릴 자주 듣습니다. 무엇보다 정신적 만족을 뺄 수 없지요. 저도 사업하다 아무리 힘들고 고민되는 일이 있어도 30~40분만 걸으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금세 집중력이 생기죠.”

●주변에도 많이 권유합니까.

“손님들도 거기서 많이 맞습니다. 임원회의도 한 달에 두 번씩 ‘새벽’에 맨발로 걸으며 산에서 합니다. 황톳길은 헬스장이자, 집무실이자, 접견실인 그런 공간이죠.”

●소주회사가 치유며 건강을 얘기하는 게 흥미로운데요.

“제가 원래 휴대전화 벨소리 업체인 ‘5425’를 창업했지요. 소리로 비즈니스를 한 겁니다. 선양은 술 회사고요. 말하자면 음주가무지요, 하하. 그렇다면 다음은 뭘까요. 쉼이죠. 휴식 말입니다. 그게 바로 사람들이 오가는 황톳길이고요. 옛날에 회사 슬로건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내건 적이 있어요. 소리·술은 물론 황톳길도 사람 간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죠. 동떨어진 게 아닙니다.”

●창업 전엔 뭘 했습니까.

“경북대 전자과를 나왔어요. 삼성전자와 LG전자에서 일했죠. 전화교환기 소프트웨어 쪽이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부속품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과감히 사표를 냈죠. 중소기업에 취직했어요. 원격으로 조종하는 계량기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전화국을 많이 드나들었죠. 그때 700 전화 서비스를 민간에게 넘길 때였어요. 회사에 ‘이거 돈 된다’고 건의했는데 사업성을 잘 모르더라고요. 92년 말에 뛰쳐나와 단돈 2000만원으로 창업했죠.”

●그때부터 ‘맨발’과 인연을 맺은 거군요.

“처음엔 운세 서비스로 시작했어요. 다방 가서 100원 넣고 뽑아 보는 ‘쪽지 운세’ 있잖아요. 거기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사무실도 없어서 동업자 집의 아이 방 침대 밑에 설비를 차리고 그런 시절이었죠. 그러다 700-5425 휴대전화 컬러링 서비스로 발전했어요. 성탄절 카드 대신에 상대의 휴대전화에 음악이 전송되는 걸 보고 젊은이들이 환호했죠. 사람들 마음을 잘 읽어낸 게 성공 비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쭉 순탄한 건 아니었을 텐데요.

“고생도 무척 많았죠. 대중을 상대로 한 사업이니 문화 트렌드를 바꿔야 한다는 부담이 심했어요. 벨소리 비즈니스는 음질이 중요했죠. 전화로 샘플을 들어야 하니까요. 일반 스피커 출력이 30W인데, 전화기는 3W 수준이에요. 음질을 높이려고 앉아서 열심히 연구했죠. 사장이자 엔지니어였던 셈입니다. 벤처죠. 그렇게 5425 브랜드를 일궜어요.”

●디테일의 힘이군요.

“황톳길 때도 그래요. 임원들과 나가서 돌멩이를 주웠죠. 길이 다져지라고 물도 여러 번 뿌렸습니다. ‘세심함의 경영’인 거죠. 이게 되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잘나가는 벨소리 회사에서 소주 업체로 돌아선 까닭은 뭡니까.

 “2000년대 초반 무선 인터넷 사업에 진출하려 했죠. 그런데 무선망 개방이 안 됐어요. 고민하다 점유율 하락 등에 매물로 나온 대전·충청 지역의 소주 업체 선양을 주목했죠. 아까도 말했지만, 소리나 술이나 대중을 상대로 한 만큼 비즈니스 본질은 같다고 봤습니다.”

●선양에도 남다른 공을 들였습니까.

“예컨대 O2란 소주를 개발했어요. 미국·중국·일본에서도 특허를 받았죠. 다른 술보다 산소를 3배 많이 녹여 넣었어요. 술이 더 빨리 깨도록요. 월 1000만 병 매출이 목표인데 점유율은 전국의 3.7% 정도 됩니다. 꾸준히 매출이 오르고 있어요.”

●소주회사 CEO의 주량은 얼마입니까.

“소주 1병 반 정도입니다. 많진 않죠. 그런데 횟수는 잦아요. 사업 때문에 여러 손님을 뵙게 되니. 해장은 물론 걷는 걸로 대신하죠.”

●회장 취임 뒤 회사가 달라진 게 있나요.

“우리 상대 업체들은 덩치가 크죠. 그러나 직원 사이에서 ‘우리가 마케팅은 더 앞서 가고 있다’고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황톳길 같은 게 조명받는 걸 보고 자긍심을 가진 거예요. 이런 건 교육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이젠 대전 어딜 가도 소비자들이 먼저 말해요. ‘너희 회사 좋은 일 한다’고요.”

●소주 광고에 여자 모델이 없습니다. 대세와 다른데요.

“배우 한채영씨를 모델로 썼었죠. 여성 모델 안 쓴 지가 3년 됩니다. 에코 힐링이 철학인데 안 맞는다고 생각했죠.”

●청소년 음주 교육도 한다면서요.

“대학 입시가 끝난 뒤 풀어지기 쉽잖아요. 그 공백기에 아이들을 위해 주도(酒道) 강의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주법이오? 스트레스 있는 술자리는 독이 되죠. 즐겁고 적당히 먹는 게 최고죠, 하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강연을 많이 하는데 이렇게 말해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원 오브 뎀(one of them·비슷한 여러 사람 중 하나)이 되는 것이다.’ 나만의 뭔가를 가져야 하죠. 특정한 것에 미쳐서 남들과 다른 걸 품어야 해요. 그러려면 ‘긍정의 힘’이 중요하죠. 제가 밑천 없이 여기까지 온 것도 긍정 때문이에요. 좌우명이 있습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쳐야 미친다, 즉 뭔가에 몰두하면 비로소 목표에 도달한다는 뜻이죠. 실패하면 어떻습니까. 거기서 남는 것도 많아요. 이런 여러 자질을 가지려면 뭐니뭐니해도 체력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황톳길 같은 데서 걷고 힘을 키워야죠.”

●조 회장님은 그래도 명문 경북대를 나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경남 함안 출신입니다. 사실 고교 때 대학 가려고 생각도 안 했죠. 집안 형편 때문에요. 그러다 대학 졸업하고 대기업 다니면서 또 퇴직을 했잖아요. 벨소리회사 거쳐 소주회사까지 왔습니다. 좌충우돌하면서요. 그래선지 주위에선 ‘에너자이저’란 별명을 붙여줬어요, 하하.”

●요즘 천착하는 고민은 뭡니까.

“제 상대는 늘 대중(大衆)이었습니다. 얼마 전 ‘크리에이티브 연구소’를 만들었어요. 경쟁력 있는 문화 콘텐트를 제작해 보고 싶습니다. 첨단 세상 속의 아날로그. 황톳길 같은 거죠. 기술은 기본입니다. 중요한 건 대중과의 공감대, 접점을 찾는 일이 아닐까요”

j칵테일 >> 세계 최고 휴양국 대통령도 계족산 황톳길 30분 걷더니 “원더풀”

대전 집무실에서 조웅래 회장을 만나 인사를 건넬 때였다. 사진기자의 예리한 눈에 독특한 사진(왼쪽) 하나가 포착됐다. 웬 남자가 해변가를 ‘올 누드’로 뛰는 야릇한…. “저건 뭡니까?” 조 회장은 “세이셸 해변에서 직접 조깅하는 장면”이라고 답했다. 세이셸은 인도양 서부 마다가스카르 북동쪽에 있는 섬나라. ‘최후의 낙원’으로 불리며 요즘 한국에서도 휴양지로 뜨는 곳이다. 무슨 인연인지 들어봤다.

# 양말 벗은 세이셸 대통령

 2007년 9월. 여수 엑스포 유치위원회가 세이셸 외무장관을 초청했다. 그가 선양소주에도 들렀다. 조 회장은 계족산 황톳길로 안내했다. 30분 넘게 걸었다. 에코 힐링을 얘기했다. 외무장관이 맞장구쳤다. “우리나라 컨셉트와 너무 잘 맞는다.” 세이셸 사람들은 젊을 땐 날씬하다. 운동을 안 해 갈수록 살이 찐다. 조 회장은 마라톤을 제안했다. 2008년 초에 세이셸에서 선양 이름을 내건 마라톤이 열렸다. 국악과 한식도 소개했다. ‘아프리카 한류’였다. 2009년엔 대통령이 한국을 국빈 방문해 신 벗고 계족산을 걸었다. 처음엔 ‘뭐 이런 걸 시키나’ 짜증을 내는 듯했다. 30분 지나 입이 확 벌어졌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계 최고의 휴양국 원수가 계족산에 백기를 든 것이다.

# 한국 온 희귀 거북

 대전 오월드 동물원엔 알다브라 거북 한 쌍이 있다. 평균 수명 200년, 최대 몸무게 300㎏인 멸종위기 동물이다. 원산지 세이셸 알다브라 섬을 빼곤 중국·프랑스 동물원 정도에만 있다. 조 회장의 마라톤 개최와 민간외교에 감동받아 세이셸 정부가 특별 선물한 것이다. 사실 거북뿐만이 아니다. “세이셸 해양 면적이 한국의 20배예요. 그런데 인구는 8만5000명뿐이죠. 바다 밑에 어떤 자원이 있는지도 잘 파악이 안 됐어요.” 중국은 이미 세이셸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 아프리카 자원 확보를 위한 지리적 요충지다. “그렇다고 우리가 인구도 얼마 없는 세이셸에 소주 많이 팔아먹을 것도 아니고. 필요할 때 누구든 가서 얘기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끈’이 생긴 거죠.”

선양의 O2 린(潾) 소주 광고엔 여성 모델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친근한 이미지를 위해 조웅래 회장의 캐리커처를 쓴다. 한 대학교수가 그려줬다. 린 소주는 로고가 21을 닮았다고 21년산 소주란 별칭도 있다.

글=김준술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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