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뒷걸음치는 한국 '뮤직비디오'

중앙일보

입력

뮤직비디오의 하향평준화 현상이 심각하다. 요즘들어 부쩍 뮤직비디오가 젊은이들 사이에 큰 인기라고 하고 또 가요계에서도 이제는 뮤직비디오를 제작하지 않고서는 프로모션 자체가 불가능하다고들 얘기한다. 문제는 이렇게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작품의 질이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 뮤직비디오 제작이 붐을 이루게 된 것은 사실 그렇게 오래된 얘기가 아니다. 케이블TV 전문음악방송이 시작됐던 약 5년전만 해도 그쪽 제작진에서는 "물건이 없어서" 프로그램 편성이 힘들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때만 해도 뮤직비디오라면 실황공연의 편집본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뮤직비디오라는 것이 대중문화 장르로 크게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98년 조성모의 〈To heaven〉이 나오면서부터가 아닌 가 싶다. 인기스타들을 동원해 노래 내용을 드라마타이즈화한 이 작품은 국내 뮤직비디오 제작의 전환점이 됐다. 최근에 쏟아지고 있는 뮤직비디오 작품들은 마치 한편의 장르영화를 보는 것처럼 규격화된 틀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자 문제다.

다시 조성모씨의 것으로 돌아가서, 최근에 그가 발표한 리메이크곡 〈가시나무〉의 뮤직비디오를 예로 들어보자. 배경은 일본 홋카이도의 눈내리는 도시. 등장인물은 삼각 혹은 사각의 연인관계다. 남자든 여자든 그들 중 한명은 그 지역 조직 폭력배의 보스와 관계가 있다. 처음엔 주인공들의 따뜻하고 차분한 사랑이 그려지지만 나중에는 비극적인 사랑의 분위기로 바뀐다. 주인공들은 깡패에게 린치를 당하거나 쫓기고 여자 혹은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을 택한다. 배경이 일본인만큼 주인공들은
종종 기모노 옷차림을 선보인다.

이런 분위기의 뮤직비디오는 비단 조성모씨의 것만이 아니다. 장소를 살짝 바꾸고 나오는 배우들을 다른 사람들로 바꾸었을 뿐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들이 부지기수다. 얼굴없는 가수로 인기몰이를 시도했던 "스카이"의 〈영원〉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캐나다 밴쿠버가 무대라는 점만 빼고 삼각관계를 암시하는 세명의 연인, 형사와 범인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총격씬 등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가지고 음악팬들의 눈과 귀를 잡으려고 하는가. 바로 스타 시스템이다. 최고의 인기스타들을 기용하는 것이야말로 최근 만들어지고 있는 뮤직비디오의 유일한 생명선이다. 〈가시나무〉에는 김석훈 이영애 구본승 손지창씨 등이 출연했으며 〈영원〉에는 차인표 김규리 장동건씨 등이 나왔다. 모두들 요즘 내로라하는 쇼비즈니스계의 스타들이다. 당연히 값도 비싸다. 고액의 출연료를 지불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제작비도 급상승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 해외에서 올 로케로 촬영된다. 〈영원〉의 뮤직비디오에는 3억원이 들었다. 웬만한 저예산영화의 총제작비를 3분여의 작품에 쏟아 부은 셈이다.

방송위원회와 종합유선방송위원회 연예오락심의위원회의 심의 사항 가운데 최근들어 제재 건수가 가장 많은 것이 뮤직비디오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뮤직 비디오들이 야하기 때문에?
정답이 아니다. 선정성보다는 폭력성때문에 불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댄스음악의 상당수가 총기 사용, 과도한 린치 장면 등을 내용으로 하는 뮤직비디오를 내놓는 경우가 많다. 위원회의 판단으로는 뮤직비디오의 소구층이 성인보다는 청소년이 더 많은 만큼 과도한 폭력은 "문제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학교가 무너지고 있다느니, 청소년들의 폭력문제가 심각하다느니하는, 사회문제가 속출하고 있을 때다. 두 위원회 모두 상당수의 뮤직비디오가 청소년들의 폭력을 조장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영상물에서의 성적 표현의 한계는 어디까지 둘 것인가"라는 주제로 얼마 전 열렸던 종합 유선방송위원회의 세미나에서 한 토론자는 "〈거짓말〉같은 영화보다 〈주유소 습격사건〉같은 영화가 젊은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 오히려 더 위험한 작품이다. 앞으로는 선정성보다 폭력성에 심의의 잣대가 더 비중있게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영화감독 잘만 킹 역시 〈레드 슈 다이어리〉같은 자신의 성애물이 사회폭력을 유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도한 폭력이 난무하는 액션영화가 모방범죄들을 낳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요즘의 뮤직비디오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비슷비슷한 초록의 동색의 뮤직비디오를 서로 모방해서 작품을 대량생산한다는 점에 대해 백번 이해한다 해도 왜 하필 과도한 폭력의 분위기만을 베끼는 것일까. 아무리 홍콩 느와르의 분위기가 젊은 층에게 쉽게 어필한다 해도, 홍콩 느와르에는 최소한 시대적 정서가 녹아있다고들 애기한다. 하물며 홍콩 느와르만 해도 이제는 옛것이다.

"문제는 가사다."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나라 가요의 대부분이 연인들의 사랑과 이별을 내용으로 다루고 있고, 개방화 추세가 빨라지면서 남녀관계의 복잡성이 더해지는 경우가
많다. 친구의 애인을 사랑했다는 고백이 부쩍 많아진 것도 그같은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가사를 모태로 삼고 있는 한 뮤직비디오 역시 획일성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지적은, 일정 정도 설득력이있다.

그렇다면 결국 창의성의 문제다. 그리고 그 창의성을 뒷받침하는 인문사회학적인 인식의 깊이 문제다. 요즘 뮤직비디오에는 생각을 읽을 수 없다. 대충, 이 정도의 감각이면 되지 않겠느냐, 이래도 안 볼래 식의 강짜 심리만이 읽혀지는 경우가 많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는 전체 음반시장을 죽이는 결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대중들은 그렇게 착하지 않다. 싫증을 잘 내는 사람들이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