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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최승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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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시인 최승호(57).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이기도 한 그는 감정이 배제된 객관적 시선으로 현대 물질문명을 비판하는 시를 써왔다. 생태주의적 세계관도 그의 시에 녹아들었다. 그런 시들로 오늘의 작가상·김수영문학상·이산문학상·현대문학상·미당문학상 등을 두루 받았다. 그런 그를 어린이들도 좋아한다. 2005년부터 거의 매년 낸 『말놀이 동시집』이 최근 5권까지 완간됐다. 그가 지은 동시에 대중가요 작곡가 방시혁씨가 곡을 붙인 동요집과 CD도 올해 나왔다. 동시집과 동요집은 현재까지 모두 16만 부가 나갔다. 시인을 만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의 의미에 대해 들었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어린이들이 최 교수님 시를 좋아한다죠.

 “독자 16만 명이면 축구장 두 개 정도가 찹니다. 축구장 두 개를 가득 채운 어린이들이 내 동시를 보고 웃고 있는 셈입니다. 보람이 크죠.”

●동시집이 히트를 한 비결이 무얼까요.

 “그동안의 동시는 의미 중심이었어요. 저는 의미보다는 우리말이 갖고 있는 소리의 맛과 멋을 중심으로 시를 썼어요.”

●교수님의 대표적인 동시를 하나 암송해 주신다면.

 “제목이 ‘도롱뇽’입니다. ‘도롱뇽 노래를 만들었어요/도레미파솔라시도 들어보세요/도롱뇽 레롱뇽 미롱뇽 파롱뇽 솔롱뇽 라롱뇽 시롱뇽 도롱뇽’.”(웃음)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하군요.

 “우리말에 그런 재미가 있어요. 가령 ‘새우’랑 소리가 비슷한 말로 ‘새우다’가 있잖아요. 그래서 ‘새우야! 밤을 새우니까 눈알이 튀어나오는 거야. 이제는 새우지마’ 이런 식으로 시를 지었죠. 또, ‘너구리’란 시는 ‘너, 구려. 너 구린 거 알아. 너 똥 먹었지?’ 이런 식으로 언어를 해체하고, 말 자체가 가진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죠. 이런 놀이를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이전의 동시들은 왜 소리에 주목하지 않았을까요.

 “한글의 수난사 같은 것이죠. 한글은 한자문화권 속에서 천대받았고, 일제시대에는 연명하다시피 했죠. 이후로 한글은 ‘메시지’로만 사용됐습니다. 우리말 자체가 갖고 있는 맛과 멋을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봐요.”

●동시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30년 전에 자원해서 탄광촌이 있는 강원도 사북에서 3년쯤 교사 생활을 했어요. 탄광촌이라는 곳이 완전히 잿빛 골짜기예요. 아이들이 놀 데도 없고 시냇물은 시커멓고 하루 종일 재가 내리는 마을이었죠. ‘아이들에게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쓴 동시를 모아 동시집을 1년에 네 권 만들었어요.”

●따님을 주독자로 삼아 동시를 쓰셨다면서요.

 “말놀이 동시집 1권을 쓸 때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동시를 쓰면 제일 먼저 딸에게 보여줬어요. 아이가 ‘잘 모르겠다’ ‘어렵다’ ‘재미 없다’ 하면 가차 없이 뺐어요. 그러다 보니 실제 책에 실린 것의 두 배를 썼어요.”

 최 교수의 시를 ‘모니터’해 주던 딸 여래(16)는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다. 요즘 최 교수는 여래가 좋아하는 인기가수 그룹 2NE1, 빅뱅의 음악을 즐긴다. 이따금 여래와 함께 매장에 가 CD를 사기도 한다.

●교과서에 최 교수님 시가 실린 것을, 따님은 좋아하겠죠?

 (그의 작품 ‘허수아비’가 초등학교, ‘오솔길’이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대설주의보’ ‘북어’ ‘아마존 수족관’ ‘반딧불 보호구역’ 같은 시는 EBS 교재나 참고서에 곧잘 나온다.)

 “여래 학교 선생님들이 여래한테 ‘아빠 사인을 받아달라’고 해서 제가 벌써 열 번은 사인했어요. 거의 연예인 수준이죠.”

●교수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아버지가 강원도 전역에 목장갑을 대는 사업을 하셨어요. 아주 잘살았죠. 그러다 서울의 무슨 OO타월인가 하는 회사 때문에 아버지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정치에도 관여하시는 바람에 중 1 때 아버지 사업이 망했죠. 그 후로는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버지는 좀 권위주의적인 분이셨어요.”

●따님 때문에 인기가수 노래를 들으시나요

 “아뇨. 저 자신이 음악을 좋아해요. 제가 대학(춘천교대 73학번) 졸업하고 음악감상실에서 6개월간 DJ 한 적도 있는걸요. 중학교에서 1년 반가량 국어교사 하다가 잠깐 쉬던 중이었어요.”

●문학과 음악에 두루 관심이 있으셨군요.

 “사실 제가 어릴 때에 그림을 더 좋아했어요. 중학교에서 미술반도 했죠. 중 3때 담임 선생님이 소설가 전상국 선생님이셨어요. 지금 춘천에 있는 ‘김유정 문학촌’ 촌장을 하시죠. 선생님이 저보고 ‘네가 문학 하게 될 줄은 진짜 몰랐다’ 하셨어요. 얼마 전에는 전화 주셔서 ‘우리 손녀가 네 시 아주 좋아한다’ 하시더라고요.”

●미술에서 문학으로 진로를 왜 바꿨습니까.

 “대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시라는 것을 써 봤어요. 그걸 문학동아리에 있던 친구가 보곤 학교 신문에 실었어요. 이외수 형이 그때 춘천교대 같이 다녔는데, 저를 보고 ‘야, 너 시 쓰면 잘 쓸 것 같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을 때려치우고 시를 쓰게 됐죠.”

●탄광촌 교사는 왜 자원하셨어요.

 “DJ 마치고 정선 동면 화암리에 있는 학교에 발령을 받았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곳이에요. 거기 있을 때인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을 했죠. 그런데 경치가 너무 아름다우니까 도무지 시를 쓸 수가 없더라고요. ‘와, 꽃 좋네’ 하고 풍류객처럼 돌아다녔죠. 좀 황막한 데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그래서 사북에 있는 탄광촌으로 가게 됐어요. 거기에서 ‘대설주의보’라는 시를 썼죠.”

●그러다 어떻게 전업작가가 되셨나요?

 “등단하고 나서 보니까, 원고 청탁도 없고, 등단이라는 게 별것 아니더라고요. 82년에 서울 올라와서 출판사에서 편집자 생활을 했죠. 어린이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어요. 1년 만에 폐간되긴 했지만….”(웃음)

●결국 30년 넘게 시를 써오셨는데,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요.

 “일반적인 정의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고 형상화하는 언어예술’이죠. 그런데 시가 벽돌같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만 해도 이전에는 회화성을 중시하다가 최근에는 음악성을 중시하고 있거든요. 이렇게 계속 바뀌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가지고 시를 쓰게 되겠죠.”

●하지만 ‘대설주의보’ 같은 시들에서 동시를 연상하긴 어려운데요.

 “세계가 음과 양으로 구성돼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저는 어느 한편에 서 있고 싶지 않아요. 저는 무소속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식 덕분에 자유롭게 시를 쓰죠.”

●시인의 인생에 만족하시는 것 같군요.

 “제가 별로 바라는 게 없어요. 무엇인가를 바라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핍이 돼요. 그럼 제가 굉장히 불만이 많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가능한 한 바라지 말자’ 그렇게 생각을 해요.”

●이미 충분히 행복하시군요.

 “그렇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고, 동시도 쓰고 있으니까요. 제가 서울 양재천 주변에 살면서 자주 양재천에 나가요. 거기에는 잉어·왜가리·백로가 있고, 뱀과 너구리도 있어요. 산란을 하러 잉어들이 한강에서 엄청나게 올라와요. 또 양재천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있고, 걷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게 행복이죠. 행복을 느끼려면 행복에 대한 감각, 촉수 같은 게 있어야 해요. 햇빛은 묵은 햇빛이 없어요, 늘 최초의 햇빛이에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지 과거, 미래를 살지 못하잖아요. 시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죠. 저는 백지에 만년필로 시를 쓰는데요, 내가 글을 썼던 밤들은 모두 절대적인 시간이죠. 그래서 저는 제 시간을 아주 아껴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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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나온 내가 쓴 시 문제 다섯 개 중 네 개 틀렸어요”

최승호 교수 인터뷰가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린 적이 있었다. 서울시교육청에서 마련한 중등교사 연수에서 최 교수가 한 ‘가래침’ 발언이 알려진 뒤다.

 당시 최 교수는 “시에서 이미지는 살, 리듬은 피, 의미는 뼈인데, 살과 피는 빼고 학교 교육에선 ‘뼈’만 얘기한다. 그런 나쁜 가르침은 가래침과 같다”는 발언을 했다. 수능시험에 나온, 자기 시에 관한 문제를 자신도 대부분 틀렸다는 얘기도 강연에서 했었다.

 “어휴, 그 발언 때문에 애 먹었어요. 저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인데, 그게 얼마나 센 표현이에요?”

 그래도 최 교수의 소신은 변함 없는 듯했다.

 “제가 다섯 문제 중에 네 문제를 틀렸어요. 그런데, 신경림 시인은 10문제 중 7 문제를 틀렸다나. 아무튼 그 후로는 객관식 문제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들은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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