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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네버 어게인 2002’ … 미, 고엽제 정보 투명하게 공개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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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수정
정치부문 기자

9년 전 이맘때다. 전국이 월드컵 열기로 가득 찬 6월 13일. 친구의 생일 파티 장소로 가던 경기도 양주의 두 여중생 효순·미선양이 훈련 중이던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월드컵으로 응축된 에너지는 반미 시위로 폭발했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과 운전병의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가 거세졌다. 11월 22일 미 군사법원 배심원단이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불 속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네티즌 ‘앙마’가 촛불시위를 제안한 뒤 11월 30일부터 광화문은 거대한 촛불로 뒤덮였다. 16대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로 치닫던 때였다. 후보들은 어느 진영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미국을 비난했다.

 20일 충격적인 보도가 나왔다. 1978년 주한미군이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미군기지 캠프 캐럴에 ‘고엽제’가 든 드럼통 250개를 묻었다는 이 부대 출신 미군 3명의 증언이다. 이들은 드럼통을 묻은 자신들도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이 부대 주변에서 살아온 주민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고엽제’의 성분 다이옥신의 맹독성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다. ‘공포’의 존재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20년 된 드럼통은 이미 삭았을 것이고, 당연히 그 독성분은 주변 땅과 지하수를 오염시키지 않았겠는가.

 9년 전 한국땅에서 거대한 반미 물결을 목격한 미국 정부는 이후 대한국 외교에서 ‘네버 어게인(Never Again) 2002’ 기조를 갖게 됐다고 한다. 한 외교관은 “미측의 사과도 사고 후 두 달이 지나서 이뤄졌다. 당시 한국 사회의 기류를 읽지 못한 토머스 허버드 당시 주한 미대사를 원망하는 한·미 외교인사들이 꽤 있었다”고 말했다.

 ‘고엽제 드럼통’ 사건은 물론 효순·미선양 사건과는 다르지만 우리 국민의 건강과 직결돼 있어 매우 민감한 문제다. 그동안 보도돼온 주한 미군 기지의 중금속, 기름 유출 같은 환경 오염과는 차원이 다르다.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은 “화학물질이 발견된다면 적절한 방법으로 처리할 것”이라며 “발굴작업이 필요하다면 한국 정부 관계자들도 참관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미국은 고엽제 매립과 관련한 정보를 최대한 빨리 투명하게 공개하기 바란다. 무엇보다 우리의 관할권이 미치지 않는 캠프 캐럴 기지에 대한 우리 정부의 공동조사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9년 전엔 인터넷을 통해 반미 정서가 확산됐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이보다 더 빠르고 파급력이 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묶여 있다. ‘네버 어게인 2002’의 정신은 계속돼야 한다.

김수정 정치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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