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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미혼모’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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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김옥균이 쓴 『치도약론(治道略論)』(1882)에는 근대적인 국가의 운영을 위해 인구통계조사가 필요하다는 점이 지적돼 있었다. 그는 “지금 구미(歐美)의 모든 나라에서는 호적법을 실시해 매년 호구(戶口)를 조사하여 남녀의 죽고, 살고, 옮겨가는 숫자를 명료하게 알고 있으니(…) 이 법이 만일 어지러우면 화폐를 만들고 병정을 뽑는 것도 또한 실시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즉 인구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이유가 제대로 세금을 걷고, 징병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처럼 근대국가가 성립된 이후 국가에 국민은 ‘자산’이었다.

 이때부터 국가는 국민의 출생률과 사망률, 수명과 건강, 결혼과 임신을 관리·통제했다. 근대 이후 결혼제도에 대한 개선을 주장한 것도 이러한 정황과 맞물려 있었다. 국가의 입장에서 결혼은 함께 세금을 내고 출산을 통해 새로운 국민을 생산·양육하겠다는 계약으로 보였다. 특히 국가의 필요에 의해 국민의 충원이 절실한 시기일수록 국가는 국민에게 결혼을 통한 출산, 출산을 위한 결혼을 강요해왔다.

 그런데 결혼과 출산이 등식관계가 되면서 국가뿐 아니라 사회 전반이 이 두 가지가 결합되지 않은 경우에 대해서는 배제의 논리를 작동시켰다. 즉 결혼을 했음에도 아이를 낳지 않는 경우라든가, 출산을 했음에도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고 차별했다. 2009년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의식조사에 따르면 가장 많은 차별을 경험하는 집단의 1, 2위가 동성애자, 미혼모였다고 한다.

 최정희(崔貞姬)의 소설 ‘지맥’(『문장』, 1939.9)에서 혼인 외 출산을 해 아이를 혼자 키우는 주인공 은영은 “남의 등록 없는 아내요 어머니”로서 받는 차별적 현실에 절망하며 다음과 같이 외친다.

 “부모들의 비합법적 결합의 죄(?)가 그 자식에게 미치게 되어 있는 것은 그릇된 법이라는 논의가 분분하나 그것은 한 개의 공론으로 흘러가고 수없이 많은 사생아는 어느 날이나 이 거리 저 거리에 물에 기름처럼 떠돌아야 하니 이 책임은 과연 누가 지어야 할 것인가.(…) 사회는 그들의 불량을 꾸짖고 법률은 그들의 범죄를 응징하기보다 그들에게 안정한 처소와 따뜻한 애무를 주어야 할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이 나온 지 70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미혼모’라는 차별적 명칭을 폐지하는 문제와 한부모 가정에 대한 지원책이 논의되고 있는 모양이다. 반가운 일이다. 다만 이러한 이슈가 ‘가정의 달’이라 불리는 5월의 한시적인 이벤트로 끝나 결국 또 제자리걸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