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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구우며 ‘신개념 세탁기’ 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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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지난해 이맘때 경남 창원의 LG전자 세탁기사업부 연구실. 갑자기 비린내가 퍼지기 시작했다. 4∼5명의 연구원들이 연구실 한 켠에서 고등어를 굽기 시작한 것. 설혹 점심 시간이라 해도 연구실 안에서 고등어를 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내 연구실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미쳤어? 누가 회사에서 생선을 구워 먹는 거야!”

 이 같은 기행을 주도(?)한 인물이 박혜용(43·사진) 수석연구원이다. 그는 올해 출시된 LG전자의 ‘트롬 스타일러’라는 의류관리기의 개발 리더였다. 고등어를 구운 것은 옷에 밴 냄새를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는지 알아내는 실험의 한 과정이었다.

 고등어뿐이 아니었다. 고깃집에서 회식을 한 뒤에는 옷을 모아 회사로 가져왔다. 담배 냄새가 배게 하려고 담배 연기 자욱한 당구장에서 당구는 치지 않고 괜히 서성거리다 돌아오기도 했다. 이것도 모자라 연구실 안에서 삼겹살까지 구웠다. 박 연구원은 “그때 다른 연구팀에서 눈총 받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트롬 스타일러 내부 모습.

 이런 실험을 거쳐 올 3월 초 트롬 스타일러가 출시됐다. 200만원 안팎의 고가라 LG전자는 애초 올해 7000대 판매를 목표로 세웠다. 하지만 트롬 스타일러는 출시 두 달 만에 4000대가 팔렸다. 인기를 끌자 몇몇 중견 생활가전업체들까지 의류관리기 시장에 뛰어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박 연구원은 “올해 3만 대 정도 팔릴 것으로 예상한다”며 “내수용으로만 생각했는데 올 여름엔 대만, 연말에는 중국 시장에도 진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트롬 스타일러에 대한 아이디어는 2000년대 중반 들어 처음 나왔다. 일반 세탁기로 빨 수 없는 고급 기능성 의류가 점점 많아지던 때였다. 드라이클리닝을 하려고 세탁소를 더 많이 들락거려야 할 소비자의 불편을 덜어 주자는 게 아이디어의 핵심이었다. 2006년 10월 박 수석을 중심으로 4명의 개발팀이 꾸려졌고, 이후 4년6개월 동안 온갖 시험이 행해졌다.

 박 연구원은 “냄새 제거도 고민거리였지만, 주름을 펴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증기를 쏘이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결국 주부들이 빨래 후 옷을 터는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 옷을 걸어놓고 진동을 발생시켜 주름이 펴질 때까지 부르르 떨어 주는 연구만 1년 반을 했다. 분당 220회로 진동을 시킬 때 옷감이 상하지 않게 하면서 주름을 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옷도 많이 샀다. 다양한 옷감을 테스트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타일러는 고급 의류를 손질하는 기기. 그래서 모피 코트나 고급 정장 같은 비싼 옷을 많이 사야 했다. 그러다 보니 옷 구입비만 1억원 가까이 들었다. 박 연구원은 “아내 친구의 한복을 빌려 무작정 집어넣어 보기도 했다”며 “결과가 좋았기에 망정이지 한복이 잘못됐으면 아내와 친구가 서로 얼굴을 붉힐 뻔했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옛날엔 연중 행사로 목욕을 했지만 지금은 매일 샤워를 한다”며 “마찬가지로 세탁이나 드라이 클리닝을 몰아서 하던 문화도 스타일러를 통해 어느 정도 바뀔 것 같다”고 말했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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