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명 하달하던 ‘왕의 길’의 일부 일제 땐 철도에 모두 덮힐 뻔 다리 주변 옛길 복원론 힘받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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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호 18면

다리의 만듦새는 그리 정교하지 않다. 홍예 이외의 부분은 자연석 그대로다. 그러나 다리 주변은 돌이 없는 지질이라 많은 인력이 동원돼 멀리서 석재를 운반해야 했다. 개인이 할 수 없는 토목사업이었다. 최 교수는 “4대 강 사업을 하다 발견한 문화재 중 처자다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발굴 작업은 23일께 마무리된다. 우리문화재연구원은 20일을 전후해 관계기관과 문화재전문가, 시행사를 초청해 발굴 성과를 설명하고 처리 방안을 듣는 자문위원회를 연다. 다리를 다시 찾아낸 이종규씨는 “삼랑진 사람들의 소망은 발굴된 다리를 기준으로 옛길을 일부분이라도 복원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영준 교수의 의견은 좀 더 구체적이다. 처자다리에서 부근의 작원관(鵲院關)까지를 문화재로 지정해 옛 도로를 복원하자는 것이다. 작원관은 임진왜란 때 삼랑진 백성과 군인 300명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 1만8700명을 맞아 결사항전을 벌였던 전적지다. 이곳을 지나는 영남대로는 가파른 절벽의 허리를 지나는 잔도로 현재도 흔적이 남아 있다. 처자다리에서 이곳까지 옛 모습대로 복원하면 향토색 짙은 전설과 임진왜란의 교훈까지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빛을 본 영남대로의 한 자락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조선을 합병한 일본은 영남대로에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려고 했다. 조선의 지식층이자 권력자인 유생들의 본거지 한복판을 뚫고 지나가 그들의 길을 빼앗고자 했다. 유생들의 반대로 철도는 대구에서 방향을 틀어 추풍령을 넘어갔지만, 일제는 조선 식민지화의 최우선 과제가 주요 교통로 장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리는 한국의 교통사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구한말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이 나라엔 길이라는 게 아예 없다’고 한탄했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길 사정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자다리는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는 강력한 증거다. 조선 중기 부유했던 삼랑진 고을에서 관리는 아이디어를 내고 유지는 돈을 쓰고 백성들은 부역을 해 튼튼한 다리를 만들어 썼다. 우리 민족 생활사의 만만치 않은 단면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사진은 발굴 작업 현장 모습이다. 뒤로 부산을 출발해 서울로 쾌속 질주하는 KTX의 모습이 보인다. 경남 물금과 밀양 사이의 경부선 철도는 조선의 영남대로와 거의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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