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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스러운 무인 기질 vs 자유분방 타고난 문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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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호 09면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시절 김종문(가운데) 시인. [중앙포토]

6·25전쟁을 겪은 1950년대의 한국 문단에는 현역 군 고위 장교들이 많았다. 정훈장교 출신의 선우휘 소설가와 이용상 시인은 대령이었고 별을 단 문인도 몇몇 있었다. 장호강·이영순 두 시인은 일선 사단장을 지낸 후 준장으로 예편했다. 최고 계급자로는 국방부 정훈국장을 지낸 후 57년 중장으로 전역한 김종문 시인이 꼽힌다. ‘군인과 문인’이라면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특히 고위 장교라면 문단에 이름만 걸어놓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겠지만, 이들은 모두 왕성한 작품 활동을 폈다. 김종문의 경우엔 문단에도 깊숙이 간여해 퇴역 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을 거쳐 오랫동안 현대시인협회 회장도 지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9> 형제 시인 김종문김종삼의 갈등

김종문은 군에 있을 때의 일화도 많다. 9·28 서울 수복 직후의 일이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던 3개월여 사이 서울에 남아있던 몇몇 문인들의 부역 행위에 대한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문화단체총연합회에 ‘부역 문인’ 명단 제출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문인들의 특별심사위원회가 구성됐다.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방침이 정해져 있었으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종문의 배려로 노천명 시인만이 잠깐 고생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더 극적인 일화도 있다.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졌을 때의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문이 거리 곳곳에 나붙었다. 국방부 정훈국장이던 김종문이 자신의 재가 없이 붙였다 하여 모두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대통령은 불같이 노했다.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을 불러 김종문을 당장 총살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전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종문은 속절없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끌려가면서 부하들에게 이 사실을 대통령 공보비서관이던 김광섭 시인에게 급히 알리라고 지시했다. 김광섭은 곧장 대통령에게 달려가 “뭔가 착오가 있는 듯하니 총살형만은 유예하고 자세한 내용부터 알아보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침묵의 허락으로 김종문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종문에게는 시인 아우가 있었다. 문단에서 흔히 ‘낮도깨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자신은 도깨비가 아니며 후배 시인인 박성룡이 ‘진짜 도깨비’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김종삼 시인(작은 사진)이다. 김종문은 1919년 평양에서, 종삼은 22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세 살 터울인데 형이 81년 세상을 떠나자 아우도 3년 뒤 타계했다. 똑같은 62세였다. 중학교를 나와 일본에 유학했던 것도 같다. 김종문은 도쿄의 아테네 프랑세를 졸업했고, 종삼은 도요시마 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시단에 데뷔한 경로는 약간 다르다. 김종문은 40년대 후반부터 잡지에 시를 발표하다가 52년 첫 시집 『 벽 』을 펴내고 등단했으며, 종삼은 피란지 대구에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해 57년 전봉건·김광림과 함께 3인 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 』를 펴내며 본격적으로 시단에 뛰어들었다.

베레모를 즐겨 쓰고 파이프 담배를 선호하는 취향도 비슷하다. 비슷한 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제간의 사이는 그리 돈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의 문단 친구들에 따르면 김종문은 동생 이야기만 나오면 의도적으로 딴전을 피웠다는 것이며, 김종삼은 형 이야기만 나오면 ‘똥장군’이라며 억지로 깎아내리려 했다는 것이다. 형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하는 문인들도 많았다. 심지어는 문인들이 많이 모이는 다방이나 음식점에서 우연히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되면 서로 못 본 체하는 것은 물론 먼저 와 있던 쪽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버리는 경우도 잦았다는 것이다.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형은 아우를 위해 세심한 배려를 했으리라는 근거도 있다. 가령 김종삼의 경력을 살펴보면 55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국방부 정훈국 방송과에서 음악 담당으로 일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무렵 형 김종문은 국방부 정훈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니 형이 일자리를 주선했으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즘 같으면 ‘낙하산 인사’라는 소릴 들었을 법하지만 어쨌거나 그 이후 김종삼의 삶과 문학에서 음악을 떼어놓을 수 없고 보면 김종문은 아우에 대해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김종삼은 국방부를 사직하고 63년 개국한 동아방송으로 자리를 옮겨 76년 퇴직할 때까지 음악PD로 일한다. 국방부에서 일하던 시기를 합치면 모두 20여 년간 김종삼에게는 음악이 삶의 방편이자 방식이었다. 시와 음악을 떠난 그의 삶은 무절제했지만 그는 시인으로서의 명성과 함께 음악PD로서의 명성도 함께 쌓았다. 그래선지 그의 시 가운데는 음악을 소재로 다뤘거나 음악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이 많다. ‘전주곡’ ‘둔주곡’ ‘12음계의 층층대’ ‘G.마이나’ ‘연주회’ 따위가 그것이다. 어쨌거나 김종삼을 음악의 길로 이끈 장본인은 형 김종문이었다고 봐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형제는 왜 우애가 돈독하지 못했을까. 그들 형제와 함께 친했던 많은 문인들은 성격 혹은 기질 차이 탓으로 본다. 형은 동생이 여류시인 K와 딴살림을 차리는가 하면 반듯한 직장을 가졌으면서도 일평생 자기 집 한 번 가져보지 못하는 등 자유분방하고 무절제하게 살아가는 태도를 미워했고, 동생은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이루고야 마는 형의 고집스럽고 독선적인 태도를 미워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곧이곧대로 물불 가리지 않는 김종문의 무인 기질과 허무주의적이며 퇴폐주의적인 김종삼의 시인 기질도 서로 간에는 상극이었던 듯싶다.

그래도 81년 1월 17일 김종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오랫동안 형과 왕래를 끊고 살았던 김종삼은 형의 빈소를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고인에 대한 예의도 제대로 갖추는 둥 마는 둥 마치 남남인 조문객처럼 문인들 사이에 잠깐 끼어 앉았다가 슬그머니 나가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 김종삼도 타계했으니 생전 형제의 갈등이 지금까지도 많은 문인들을 안쓰럽게 한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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