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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음식잡설 ⑤ 이탈리아에서 만난 냉장고 없는 식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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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이탈리아에 있을 때의 일이다. 시골의 포도밭을 돌다가 한 허름한 식당에 들렀다. 나이 든 주인 내외가 단출하게 운영하는 듯했다. 남편은 부엌을 맡고, 아내는 접대를 하는 식이었다. 메뉴판을 찾으니 따로 준비된 것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날 준비된 음식을 말로 하나하나 설명했다. 디저트로 뭔가 시원한 것을 먹고 싶어서 젤라토(이탈리아식 아이스크림)를 찾으니 웃으며 준비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저희 집은 냉장고가 없답니다.”

 냉장고 없는 식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실제 만날 줄이야. 모든 메뉴는 그날그날 시장을 봐 물 좋고 싱싱한 제철 재료를 골라 결정한다고 했다. 그래서 메뉴판도 없고 냉장고도 들여다 놓을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딱 팔 만큼만 요리하면 되는, 나처럼 게으른 요리사에겐 꿈의 식당이었다. 그러나 이윤 추구에 목을 매는(엄밀히 말해서 생존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도시의 요리사에겐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식당이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 근대적인 레스토랑이 생긴 건 프랑스 혁명 이후이니 당연히 오늘날의 전기냉장고가 있을 리 없었다. 그 시절은 당연히 모든 요리가 제철 재료로 만들어졌다. 소금을 친 저장식품은 논외로 치고 말이다. 재료를 상하지 않게 쟁여두는 냉장고가 없으니 재료가 다채롭지 않았지만, 대신 장점도 많았다. 멀리서 기름이나 석탄을 써서 가져오는 재료는 당연히 없었다. 어쩔 도리 없이 이른바 ‘로컬푸드’만 쓰는 셈이었다. 지역의 농민과 어민이 수고해서 만든 재료가 선택됐다. 또 냉장하거나 냉동해서 재료의 본질이 변할 가능성이 없었다. 없으면 안 쓰고, 제철을 기다리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냉장·냉동고의 발명은 식당과 요리의 개념을 혁신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언제든 먹고 싶은 걸 먹고 만들어 팔 수 있게 됐지만 그만큼 잃어버린 것도 있었다. 사람이 절기에 따라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던 방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거였다. 요즘 봄에만 나는 아스파라거스가 식당에 사철 공급된다. 봄에는 미국산이나 국산을 쓰고, 가을이면 남반구에서 오는 걸 쓰면 된다. 계절이 반대니까 얼마든지 공급이 된다. 이러다가는 쑥이나 냉이도 칠레나 호주에서 재배해서 한국에 들여올지도 모른다. 이런 걸 편리하다고 좋아할지, 재앙이라고 탄식이라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울의 몇몇 식당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요리사보다 전자레인지가 더 많고, 냉동고가 부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주문이 들어오면 맨 먼저 냉동고에서 재료를 꺼내 전자레인지로 해동을 한다. 재료의 손실도 적고, 인건비도 많이 줄일 수 있어 이런 방법을 선호하는 식당이 많다. 이렇게 만든 음식은 칼로리는 보존할 수 있을지언정, 재료의 향과 식감은 잃어버린다. 요리사가 제철에 나는 재료를 모른다. 남도의 바다에서 언제 멸치가 움직이는지, 비금도 섬초는 언제 가장 맛있는지, 제주도 무가 아삭아삭할 때는 언제인지 모른다. 아니,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언제든 대형 저장고에서 수요에 맞춰 공급되고, 어떤 것은 냉동해서 사철 착착 식당의 주문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좋은 재료로 맛없는 요리를 할 수는 있지만 나쁜 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할 수는 없다.”

 요리계에 떠도는 금언이다. 사각거리는 이월 봄동의 맛을, 사월 홍합의 진한 국물 맛을, 옛 오월 딸기의 향기를 한 번이라도 경험해 봤다면 이 금언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내가 아는 어느 음식 전문가는 이런 말을 했다.

 “제철에 무안으로 차를 몰면 멀리서 양파 향기가 납니다. 그 냄새만 맡아도 침이 꼴깍 넘어가지요. 사철 요리 재료로 무한정 공급되는 양파조차도 제철이 있다는 걸, 그때 느끼게 됩니다. 지구상 만물이 다 자연과 함께 사는구나, 알게 된다고나 할까요.”

 그런지도 모른다. 지구의 모든 생명 중에 오직 사람만이 제철을 마음대로 거스르며 산다. 그러자면 에너지를 써야 하고, 그 냉장·냉동고를 돌리기 위해 원자력도 필요하게 된다. 사람의 근심은 알고 보면 다 자초한 것이라는 걸 이 봄날의 밥상에서 깨닫는다. 혹시 한국에도 냉장고 없는 식당을 여실 분, 어디 안 계실까. 제가 단골이 되어 드리리다.

박찬일 음식 칼럼니스트 chanilpa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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