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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화해가 시대정신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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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

화해와 용서는 종교적 화두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어젠다도 될 수 있는 것일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파한 바이블처럼 용서의 메시지가 강렬한 곳도 없다. 원수에 대해 복수를 해도 시원치 않은데 건국세대와 사랑하라고 하다니…. 그래도 그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말은 없다. 정치는 어떤가. 정치는 용서와는 어울릴 수 없는 살벌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승자는 으쓱대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패자는 쓰디쓴 쓸개를 먹으며 복수를 다짐하는 곳이 정치가 아닌가. 승패만 있고 화해는 없다는 사실은 선거 때마다 뼈저리게 절감한다.

 그럼에도 정치에서 용서와 화해를 화두로 삼은 최근의 사례가 있다면 단연 남아공의 만델라다. 그는 일생 동안 백인에 의해 혹독한 박해를 받았지만, 대통령이 된 후 용서를 실천했다. 놀라운 일화 중 하나가 백인들이 열광했던 럭비팀의 해체를 막은 것이다. 그것이 영화 ‘인빅터스’에서 그려지는 영상인데, 백인 지배의 상징인 럭비팀을 없애야 한다고 그토록 흑인들이 아우성쳤음에도 만델라는 살려냈다. 악명 높은 차별정책으로 인해 젊음과 자유를 앗아간 백인들에게 만델라는 원한 대신 용서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그래서 남아공은 내란을 겪지 않고 화합의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정치에서 화해와 용서를 부르짖은 사람은 미국의 링컨이다. 그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민주주의 예찬 연설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만, 진짜 핵심은 화해와 용서다. 그 연설 어디에서도 적군이었던 남군을 비난하지 않았다. 북군과 똑같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자로 추도했을 뿐이다.

 그 화해와 용서의 정신이 왜 이 시점에서 절실한 것으로 느껴지는가. 지금의 우리처럼 화해와 용서가 필요한 공동체도 없다. 우리 공동체엔 두 개의 균열점이 있다. 하나는 호국세대와 4·19세대의 불화고, 또 하나는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불화다. 이 가운데 최근 호국세대가 4·19세대와의 불화를 치유하고자 나섰다. 지난 4·19기념일에 피해자 측에 사죄하려고 간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서 극적인 화해가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긴 호흡으로 보면 화해의 물꼬는 튼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사회에서 게티즈버그 정신이 꽃피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그 정신을 새긴 문안을 우리 상황에 맞게 만든다면 시작은 이렇게 돼야 하지 않을까.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우리 독립운동가들과 애국지사들은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웠던 일제 35년간 노예의 삶을 청산하고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이 남한 땅에 자유 속에 잉태되고, 만인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대의를 헌법에 새긴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켰습니다. 바로 그것이 대한민국입니다.”

 그렇다. 대한민국은 자유·평등·인권·민주주의라는 신성한 대의 속에 잉태된 나라다. 대한민국 건국이야말로 이 땅을 거룩하게 만든 첫걸음이 아니었던가. 그 첫걸음을 떼지 못한 북한은 최악의 국가가 됐다. 이승만 박사는 혼란스러웠던 해방 공간 속에서 건국을 구상했고, 자유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 자유의 나라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위협을 받았을 때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받으며 그 위협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 땅은 호국용사들의 피로 거룩해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자유의 신선한 향기가 온 땅에 퍼진 것은 아니다. 4월의 젊은 사자들이 있었기에 민주주의는 법조문을 넘어 우리의 가슴속에 새겨지게 된 것이다. 피를 흘린 그들이 아니었던들 어떻게 우리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을 것인가.

 결국 건국세대와 4·19세대가 이 땅을 자유가 살아 숨쉬는 거룩한 땅으로 만든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건국 없이 어떻게 4·19 혁명이 가능했을 것인가. 또 4·19 없이 건국정신은 찬란하게 빛날 수 없었다. 이 박사에 의한 대한민국 건국과 젊은 사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흘린 피가 더불어 소중하기에 양자는 같이 가야 할 동행의 관계다. 오랫동안 양자가 내외하듯 서로를 경원시한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만델라가 백인 럭비팀을 구했듯이 4·19세대가 이승만 대통령을 구할 때가 된 게 아닐까. 4·19세대가 이승만 박사를 건국·호국 대통령으로 부른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화해의 모습으로 자리매김할 터이다.

 그 누가 화해와 용서를 종교적 화두라고 했던가. 지금이야말로 독재에 대한 사죄를 받아들임으로써 4·19세대는 용서와 화해가 우리 공동체의 명실상부한 어젠다로 우뚝 섰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