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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색 신호등’ 인증샷 찍으러 해외시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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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사진 찍었는데 무슨 도로인지 설명 없어 ‘신호등 해외시찰단’이 2009년 3월 미국 뉴욕에서 찍어 국경위와 청와대에 제출한 보고서에 첨부한 사진. 하지만 이들 사진이 구체적으로 어느 도로를 찍은 것인지, 시찰단이 찍은 도로가 대표적인 것인지 등에 대한 설명이 전혀 제시돼 있지 않다.

경찰과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국경위)가 2009년 3월 해외시찰 후 청와대 등에 제출한 보고서 목록 가운데 핵심적인 것은 ‘기초 법질서 확립을 위한 교통운영체계 선진화 방안’이다. 해외시찰에서 돌아온 것이 같은 해 4월 초인 것을 감안하면 이 보고서가 제출된 4월 30일까지 채 한 달도 안 걸린 셈이다. 이렇듯 짧은 시일 내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은 보고서 내용 대부분이 기존에 이미 정리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해외시찰로 추가된 것이 있다면 각국의 신호등 사진과 동영상뿐이다.

 해외시찰단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이 같은 지적을 인정한다. 시찰단 단장이었던 정선태 현 법제처장은 “보고서는 국내 교통공학 분야의 학자들이 수십 년간 축적해 온 연구 결과들을 정리한 것”이라며 “해외시찰은 여기에 현장 모습을 담기 위해 갔던 것이고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 짧은 시간에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보고서의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해외시찰을 통해 그에 맞는 사진과 동영상 등 증빙 자료만 확보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실제로 보고서에는 미국 뉴욕, 독일 베를린, 일본 도쿄 등에서 찍은 사진들이 곳곳에 첨부돼 있다. 하지만 이 사진들이 도시의 어떤 지역에서 찍은 것인지, 3색 신호등이 해당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보고서에는 현실과 다소 상이한 내용도 포함돼 있다. 우리나라 신호체계는 ▶선진국의 ‘직진 우선’ 신호 원칙과 달리 좌회전을 먼저 주는 복잡한 신호 순서로 신호에 대한 집중력이 분산되고 ▶‘국제 표준’인 3색 신호등이 아닌 4색 신호등을 사용해 신호 주기가 ‘운전자의 인내를 넘어설 정도’로 길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지가 ‘화살표 3색 신호등’ 시범운영 교차로에 직접 나가 실태를 살펴본 결과 이 같은 불편함을 느끼는 일반 시민은 눈에 띄지 않았다.

 보고서는 또 화살표 3색 신호등 시행에 따른 혼란을 예견하고도 충분한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다른 사안과 달리 신호체계 변경에 대해서는 “교통신호는 오랜 기간 관행화된 사회적 약속인 점을 감안할 때 개선에 따른 혼란과 국민 불편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 “시행에 앞서 공감대 형성을 위한 충분한 여론수렴을 거쳐 단계적·점진적으로 확산한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보고서에는 어떠한 구체적인 홍보전략이나 계획도 나와 있지 않는 것은 물론, 이후에도 홍보 작업을 벌이지 않았다.

 경찰은 “‘직진 후 좌회전’이 도입됐을 때도 처음엔 혼선이 빚어졌지만 결국 국민이 익숙해지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직진 후 좌회전과 신호등 체계 변경의 문제를 같은 차원에 놓고 비교할 수 없다”며 “무작정 바꿔 놓으면 국민이 익숙해진다는 생각은 고압적”이라고 지적한다.

박성우·김혜미 기자

알려왔습니다  제하의 기사 관련, 시찰단원이었던 구자훈 경위는 도시마다 2박3일 일정으로 충분한 조사활동을 벌였으며, 5월 5일 보도에 나온 신호등의 위치에 대해서도 5월 4일 밤 e-메일로 알린 바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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