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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뮤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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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호 28면

이브 생 로랑(왼쪽)과 피에르 베르제.

2006년 이브 생 로랑은 ‘뮤즈백’을 선보였다. 가방은 ‘잇백’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브랜드의 저력을 보여 주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 이름을 딴 브랜드인 이브 생 로랑은 1961년 그의 의상실에서 시작됐다. 2002년 그가 은퇴하면서 브랜드가 구찌그룹으로 넘어갔으니 ‘뮤즈백’은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과는 관계가 없다. ‘뮤즈’라는 이름도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을 관장하는 아홉 여신 중 하나의 이름에서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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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쩌면 ‘뮤즈’가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과 전혀 관계없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를 보고 나서다. 2008년 세상을 떠난 그의 삶을 되짚은 다큐멘터리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다.

뛰어난 재능으로 성공한 디자이너는 여럿이지만 이브 생 로랑은 그 이상이었다. 그는 최초로 여성을 위한 바지 정장을 만들었고, 최초로 패션쇼 런웨이에 흑인 모델을 세웠다. 점프슈트·사파리 등 여러 가지 최초의 룩을 선보였다. 기존의 관습과 옷 입는 방식을 바꾼 혁명가였다.

애초 영화는 이브와 그의 동반자 피에르 베르제의 집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기획됐다. 하지만 평생의 연인이자 사업적 파트너였던 둘의 특별한 관계로 방점을 옮겼다. 영화는 피에르가 이브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흐른다.

크리스찬 디올의 조수였던 이브는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후계자가 됐다. 스물한 살의 젊은 후계자가 첫 컬렉션을 성공시킨 1958년, 이브와 피에르는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3년 뒤 크리스찬 디올에서 독립한 이브 생 로랑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함께 설립해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웠다.

키 크고 마른 체격에 뿔테 안경을 쓴 이브는 수줍고 예민한 천재였다. 천재성을 타고난 그는 늘 피로했고, 세간의 관심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피에르는 이브가 박수 갈채를 받는 순간에나 신경쇠약으로 술과 약물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나 늘 곁을 지켰다.

살아생전 이브의 버팀목이었던 피에르는 그가 세상을 뜬 뒤 연인을 천재 디자이너 이상의 전설로 남겼다. 이브와 함께 수집했던 모든 예술품을 경매에 부친 것이다. 개인의 이름으로 나온 경매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고, 단일 경매 사상 최고의 낙찰액을 기록했다. 732점의 낙찰가는 3억7390만 유로(약 6000억원). 모두 에이즈퇴치기금으로 기부됐다. 미(美)의 환영(幻影)은 삶의 풍요를 위해 필요하다는 사랑하는 연인의 믿음을 실현해 준 셈이다.

“만일 내가 죽었다면, 이브 생 로랑은 이 경매를 진행했을까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이것들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까요.”

영화 속에서 피에르는 이렇게 말한다. 50년을 함께 살면서 있는 그대로의 이브를 인정하면서 채워 준, 완벽한 동반자의 모습이 이렇게 담담한 말 속에서 드러난다.

예술가의 뮤즈. 예술적 영감을 주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피에르야말로 이브의 예술세계를 지탱해 준 진정한 뮤즈가 아닐까. 위태로운 천재에게 평생 버팀목이 돼 주고, 그가 세상을 뜨는 순간까지 함께한 ‘인생의 절반이자 영혼의 절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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