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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 평화회의에 조선이 낄 자리는 애초에 없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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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호 30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장면. 이준 등 세 명의 밀사는 각국 대표에게 외교권 회복을 역설했으나 모두 외면당했다. 제1차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1899년에 열렸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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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이준(李儁) 세 명의 밀사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열렸던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 회복을 역설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1907년 7월 4일 일본의 하야시 다다스(林董) 외무대신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한국 황제 밀사의 헤이그(海牙)에서의 행동 내탐(內探)에 관한 건(件)’이란 전문에서 “3명의 한국인은 그 후 계속 각국 외무대신과 각국 위원을 방문했으나 아무도 상대하지 않음”이라고 전하고 있다. 어느 열강도 밀사들의 애국심에 감동해 자국 이익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고종과 밀사들은 일본이 빼앗은 한국의 외교권을 되돌려 받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했지만 강대국들이 생각하는 ‘평화’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열강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약소국을 차지하는 게 열강들이 생각하는 평화였다. 열강들이 평화회의를 개최한 가장 큰 이유는 식민지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군사충돌을 방지하자는 데 있었다. 전통적 숙적인 독일과 프랑스의 충돌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두 나라가 충돌하면 동맹관계의 다른 열강들도 휘말릴 수 있었다. 이 경우 교전규칙이라도 미리 정해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자는 것이 평화회의 개최 목적이었다.

1899년의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제안해 그해 5~7월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는데 모두 26개국이 참가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를 비롯해 독일·프랑스·영국·오스트리아·벨기에·스페인·이탈리아·그리스·덴마크·네덜란드·몬테네그로(유고)·룩셈부르크·포르투갈·루마니아·세르비아·스웨덴·스위스·오스만 등 대부분의 국가가 초청된 사실상 유럽회의였다. 북미에서는 미국, 중남미에서는 멕시코가 초청받았고, 아시아에서는 청나라와 일본, 시암(태국)이 초청되었다. 일본 대표는 하야시 다다스와 아이가 나가오(有賀長雄:법학자)였는데 대한제국이 초청받지 못한 것은 러시아와 일본의 속셈이 같았기 때문이다. 이때 이미 두 나라 모두 대한제국을 자신의 몫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전경. 2 박제순 외부대신. 박제순은 대한제국의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위해 노력했다.

제1차 평화회의는 군축(軍縮), 전시(戰時)국제법, 중재재판소 등 3개 분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군축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주제였다. 그나마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선언하고 1901년부터 헤이그에 상설중재재판소를 설치한 것이 가시적 성과였다. 또 ‘육상전(陸上戰)에 관한 법규와 관례에 대한 조약’을 체결해 육군 전투 때의 규칙을 제정했으며, 1864년 제정한 제네바 협정을 해전(海戰)에서도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그 외에 기구(氣球)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금지한 것 정도가 성과였다.

그러나 불과 3개월 후인 1899년 10월 ‘네덜란드계 백인(보어인)’들이 세운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영국이 남아공 북부의 세계 최대 금광단지 트란스발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 보어전쟁(Boer War)이 일어났다. 1900년 3월에는 중국에서 의화단(義和團) 운동이 일어나자 영국·프랑스·미국·독일과 일본·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의 8개국 군대가 그해 8월 베이징(北京)을 점령했다. 보어전쟁은 트란스발을 영국이 차지하는 것으로 끝났으며(베레니깅 조약), 의화단 사건으로 중국은 9억8000만 냥이란 막대한 배상금 등을 내야 했다(베이징 의정서). 몇 개월 전에 헤이그에 울려 퍼졌던 ‘평화’의 본질이 명확히 드러났다. 20세기는 약육강식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평화회의에 초청받지 못한 대한제국은 회의가 파한 후에도 이 체제에 들어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구한국외교문서나 황성신문(皇城新聞) 등에 따르면 1901년 5월 30일 외부(外部)대신 박제순은 주한 벨기에 전권대사 방칼에게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주선해 주도록 요청했다고 전한다. 구한국외교문서는 또 1902년 2월에도 박제순이 네덜란드 외부대신이자 만국평화회의 총재인 모포(毛包乙伯)에게 만국 적십자사 및 평화회의 참석을 알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전하고 있고, 11월에는 외부대신 서리 조병식(趙秉式)이 특명전권공사 민영찬(閔泳瓚)을 통해 홀랜드(네덜란드) 외부대신 겸 만국평화회장 모부(謨富)에게 적십자사에 참가하게 해 줄 것과 평화회의에 사신을 파견하겠다고 요청했다고 전한다. 이런 요청에 대해 각국은 대부분 본국에 품의한 후 답변하겠다는 의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미 대한제국을 러시아나 일본 몫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1901년 4월 독일의 주영 대리공사 에카드슈타인은 주영 일본공사 하야시 다다스에게 “극동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독일·영국·일본의 3국동맹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1902년 1월 영일동맹으로 가시화되는데,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정치·경제적 이익’을 갖고 있음을 인정했다. 이것은 중대한 국면 변화로 이 무렵 외교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겼던 대한제국은 비상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2월 25일 서울의 하야시 공사가 도쿄의 고무라(小村) 외무대신에게 기밀(機密) 제36호로 ‘영일협약 발표에 관한 서울 정계의 상황’을 보고한 내용을 보면 상황이 달랐다. 하야시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영일협약)은 동아시아의 큰 국면으로 봐서 평화를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소견에서 비롯된 것이니, 한국 정부도 이를 거울삼아 앞으로 한층 더 양국 간의 친교를 진전시키고 분우(紛擾:분란)를 일으키는 일이 없기 바란다”고 말하자 “외부대신은 지극히 안심한 표정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신중한 태도로 본 공사의 구두진술을 청취했다”고 전하고 있다. 영일동맹의 의미 자체를 모르면서 외교에 매달렸던 것이 대한제국 외교력의 실상이었다.

이때 하야시 공사는 친러파들이 영일협약에 대해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고 보고하는데, 이때만 해도 일본이 이완용을 이윤용(李允用)·이하영(李夏榮) 등과 함께 친미파로 분류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들은 특정 이념·노선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권력과 돈을 좇았던 친권파(親權派), 친전파(親錢派)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07년 6월 15일부터 열린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의 직접적 계기는 러일전쟁이었다. 러일전쟁은 승전국 일본의 피해가 더 컸던 전쟁이었다. 약 129만 명이 참전했던 러시아는 5만여 명이 전사했지만 108만 명이 참전했던 일본은 8만4000여 명이 전사했다(橫手愼二,日露戰爭史). 이른바 평화회의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제안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주창으로 열리게 된 것도 두 사람 모두 러일전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성격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독립을 되찾겠다는 고종의 구상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이상이었다. 고종은 이토가 예상한 헐버트 대신에게 이상설을 밀사로 보내 이토의 허를 찔렀다. 이토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이를 고종 강제 퇴위의 구실로 삼았다.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1907년 7월 3일자는 통감 이토가 하야시 외무대신에게 “위 운동(헤이그 밀사)이 과연 칙명에 기초한 것이라면 우리 정부에서도 이 기회에 한국에 대하여 국면 일변의 행동을 취할 좋은 시기라고 믿는다”면서 “위의 음모가 확실하다면 세권(稅權), 병권(兵權) 또는 재판권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은 1906년 2월부터 통감 통치를 실시했지만 고종이 궁내부(宮內府)를 통해 외국과 이권계약을 하는 등 일부 통치권을 계속 행사하면서 혼선이 발생했다. 1906년 이탈리아 광업회사가 궁내부에 갑산광산 채굴권을 신청하고 1907년 2월에는 프랑스인이 평안북도 구성·선천 등의 광산 채굴권을 신청하는 등 일부 외국인들은 계속 궁내부에 각종 특허와 자원 개발권을 신청했다. 통감부는 그간 대한제국이 체결한 각종 조약 원본과 외교문서를 의정부 외사국(外事局)으로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궁내부는 ‘궁중 화재 때 모두 분실했다’고 거절하고는 고종의 조카 조남승(趙南昇)을 통해 프랑스 주교 뮈텔(Mutel)에게 그것들을 맡겨 두었다.

이토는 앞에선 순응하는 척하면서 뒤에선 다른 태도를 보이는 고종을 통감 통치의 장애물로 인식하고 끌어내리기로 결정했다. 참정대신 이완용, 법부대신 조중응,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 등이 포진한 친일 내각의 군주는 이미 고종이 아니라 이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