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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물 되살리는 ‘리본 프로젝트’ 환경고용 살리는 묘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15호 08면

1 이경순 대표(맨 왼쪽)와 디자이너들이 아이디어회의를 하고 있다 2 캔 따개를 코뜨기로 엮어 핸드백을 만드는 모습 3 폐자재 철사와 철조망 등을 이어 만든 39철의 여왕’ 웨딩드레스 4 오래된 넥타이를 패치워크한 빈티지 스커트

20일 오전 서울 장위동. 디자인 기획제작사 누브티스의 디자이너들이 뭔가를 만들고 있다. 캔 따개 수천 개를 일일이 줄을 맞춰 털실로 엮은 ‘캔 따개 핸드백’이다. 동그란 핸드백, 네모난 숄더백…. 형태도 색깔도 다 다른,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들이다. 한쪽에서는 알록달록 퀼트이불처럼 다양한 문양의 조각천이 덧대어진 스커트, 헌 넥타이를 새것으로 교환해주는 이벤트를 통해 모아 들인 오래된 넥타이들로 만든 빈티지 의상이 눈길을 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넥타이로만 만들어 달라고 한 ‘유품 디자인’ 조끼도 있다. 소파에 놓인 쿠션은 남성 버버리 코트를 뒤집고 깃을 세워 애교를 살린 재미난 모양이다.

디자인 기획사 누브티스의 아름다운 실험

“이 넥타이 조끼는 5월에 열리는 환경재단 영화제에서 최열 대표가 입을 예정이에요. 영화제라서 특별히 오드리 헵번 브로치를 제작해 달았죠.” 이 회사 이경순 대표는 요즘 캔 따개, 자동차 에어컨 필터, 라면 봉지, 깨진 와인 잔 모으기에 한창이다. 캔 따개 핸드백을 필두로 에어컨 필터는 액세서리와 철제 드레스로, 라면 봉지는 접고 엮어 업무용 결재판으로 만들었다. 받침이 깨진 와인 잔에는 가리비 껍데기로 지지대를 덧댄 뒤 진주와 크리스털로 장식했다.

5 낡은 사전의 속을 파내고 두부용기를 끼워 만든 화분 6 남성 버버리코트를 리폼해 만든 쿠션 7 망가진 피아노 건반에 피아노 연주영상이 흐르는 모니터를 부착한 벽걸이 디스플레이

히딩크 넥타이 등 우리 전통문양을 현대적으로 살린 디자인 상품으로 주목받아온 이 대표의 ‘오래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골동품 재활용’으로 이어졌다. 할머니가 물려준 모시한복으로 드레스를 만들고, 아버지의 오래된 양복과 조카가 입던 연미복에 수를 놓고 레이스를 달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리폼했다. 오랜 외국생활로 몸에 밴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은 그녀의 전공인 디자인과 자연스럽게 접점을 찾았다. 한국환경공단의 디자인 자문을 맡게 되면서 ‘폐자재를 이용한 디자인상품’ 개발에 나서게 된 것.

최근에 그는 대기업과 정부를 대상으로 폐기물디자인을 통한 환경 보호와 선물 문화에 대한 인식 전환, 고용 창출에의 동참을 호소하고 나섰다. 제조업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폐자재를 처리하기 위해 디자이너를 고용해 아이디어 환경상품을 개발하라는 것. 각 기업 특성을 살린 폐기물 제품을 만들고 본사 로비에 ‘리본(Re-born) 스토어’를 설치해 전시판매도 하고 선물로도 활용하면 기업이미지 개선으로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기업마다 선물예산이 해마다 몇백 억이에요. 없는 게 없는 VVIP들에게 명품선물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렇게 예산낭비를 할 것이 아니라 ‘폐자재로 만든 것’이라는 환경적 요소와 기업의 아이덴티티가 담겨진 의미가 부여된 선물을 하라는 겁니다. 수작업이라 원가는 높지만 가치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뿐더러, 낭비되는 예산을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에게 돌린다는 점에서도 커다란 사회공헌이 됩니다. 얼마 전에 한 예쁘게 생긴 외국 여성이 우리 매장에서 떠날 줄 모르더군요. 알고 보니 텍스타일 디자인을 전공한 영국인이었는데 자기 나라에서 취직이 안 돼 강원도 정선에 와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대요. 계약 끝나면 당장 우리 회사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이 일거리를 얻지 못해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아까운 인력을 고용하여 제조업 폐기물을 디자인한다면 환경에도, 개인에도, 기업 이미지에도 보탬이 되는 ‘윈윈 게임’이라는 것이 이 대표의 비전이다.

“캔 따개 핸드백 한 개 만드는 데만 해도 따개가 3800개 정도 듭니다. 회사 주변에 캔 따개를 모은다는 전단을 붙였더니 한 노인분이 2만개를 모아 오셨어요. 3만원만 달라시는데 너무 고마워서 20만원을 드렸죠. 캔 따개를 수거해 오는 사람들에게도 일종의 고용창출이 되는 것이죠.”

그는 지금 전국 100대 기업의 폐기물 현황을 조사해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 궁리하고 있다. 도자기 회사의 경우 소성 중 깨지는 도자기를 활용해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고, 식품회사 포장재로는 돗자리를 만들 수 있다. 신용카드 회사에서는 버리는 카드를 잘라 붙이고 자개처럼 홈을 파서 근사한 티테이블을 만들 수도 있는 등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그 아이디어가 환경과 인간을 살릴 수 있도록, 환경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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