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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무시 ‘3색 신호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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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빵….”

20일 오전 8시 서울 광화문 삼거리. 좌회전 신호를 받는 1차로에 정차해 있던 은색 스포티지 차량 뒤로 버스 한 대가 요란하게 경적을 울렸다. 신호등엔 적색 화살표가 표시돼 있었다. 좌회전을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차량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길가에 서 있던 경찰관에게 물었다.

 “ 이거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가라는 겁니까? 못 가는 거 맞죠?”

 경찰관은 어리둥절해하며 “화살표니까 가라는 것 아닌가요?”라며 오히려 옆에 있던 기자에게 물었다. 기자가 좌회전 금지 신호라고 알려 주자 “이거 무지 헷갈리겠는데요”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3색등 신호등 시범운영 첫날인 20일 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사거리에서 차량들이 새로 설치된 신호등에 따라 이동하고 있다. 경찰청과 서울시는 화살표 3색등이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데다 편의성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익숙해진 국민의 안전보다 기준도 알 수 없는 ‘국제기준’이 더 중요하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김도훈 기자]


이날 광화문과 세종로 등 서울시내 11개 교차로에서 기존의 4색 신호등 대신 3색 신호등 체계가 시범적으로 실시됐다. 하지만 새로운 신호등에선 좌우로 향하는 적색 화살표가 각각 ‘좌·우회전 금지’를 뜻한다는 것을 모르는 시민이 대다수였다. 이 때문에 곳곳에서 혼란이 빚어졌다. 특히 경찰이 지난해 1월 ‘직진 후 좌회전’을 실시하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교통 체계가 바뀌어 혼란이 가중된다는 지적이다.

 오후 2시45분 정부 중앙청사 정문 앞에선 적색 우회전 금지 신호를 보지 못한 채 달려오던 은색 혼다 승용차가 시청 방향으로 직진하던 택시와 충돌할 뻔했다. 이 같은 상황은 이날 광화문 삼거리, 세종로 사거리, 숭례문 앞 등에서 여러 번 목격됐다.

 


택시기사 박만수(53)씨는 “예전엔 없던 빨간 화살표가 생기니까 가라는 의미인지, 정차하라는 의미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송백열(58)씨도 “빨간 신호라고 하더라도 화살표가 왼쪽으로 돼 있으니 운전자들이 헷갈려한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운전자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새로운 신호등에 ‘적색 화살표 좌회전 금지’라는 푯말을 넣었지만 대부분의 운전자는 “가까이 와서야 알 수 있어 크게 도움이 안 된다”고 불평했다.

경찰청은 새 신호등을 시범 운영한 뒤 개선할 점을 보완해 서울시내 전역에서 시행할 방침이다. 경찰청은 이를 전국 단위로도 확대할 계획이다. 경찰청은 신호등을 바꾼 이유로 운전자 편의성을 내세운다. 또 글로벌 스탠더드도 강조한다. 대부분 국가는 ‘도로·교통신호에 관한 빈 협약’에 따라 3색 신호등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4색 신호등 체계를 3색으로 바꾸면 신호대기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시민들이 혼란스러워한다는 지적에 “무조건 적색에는 서고, 녹색 불에는 출발한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첫날 곳곳에서 혼란이 빚어지면서 “익숙해진 국민의 안전보다 기준이 뭔지도 알 수 없는 ‘국제기준’이 더 중요하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또 본지가 미국·일본·프랑스·중국·홍콩의 신호등을 확인한 결과 모두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어 사실상 국제기준이라는 것도 없었다. 미국은 주마다 교통신호가 다르다. 뉴저지의 경우 적색 신호에 우회전 금지(no turn on red) 표시가 없으면 우회전이 가능하지만 뉴욕시에선 무조건 녹색 신호에만 우회전이 가능하다. 녹색·노랑·빨강 3색 신호등을 사용하는 일본은 녹색과 노랑 화살표가 있지만 노랑 화살표는 노면 전차 등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사용된다. 빈 협약에 한국과 미국, 영국은 가입하지 않았다.

 이번 신호등 교체 내용을 담은 도로교통법 개정안은 지난해 8월 공포됐다. 그럼에도 경찰청이 그동안 홍보 활동에 사실상 손을 놓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청 관계자는 “전국 경찰서에 홍보 포스터를 보내 경찰서를 방문하는 민원인에게 홍보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또 4일부터 서울시청 홈페이지와 종합교통정보센터 홈페이지, 31개 경찰서 홈페이지에 화살표 3색등 도입 배경과 운전자 주의사항을 팝업으로 띄워 홍보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민의 안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신호등 체계를 바꾸는 데 공청회 한 번 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외국의 경우 신호등 교체는 에너지 절약 등 분명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만 한다. 미국 뉴저지주의 벨빌은 이번 주부터 올 8월까지 신호등 교체에 나선다. 신호등 램프를 발광다이오드(LED) 전구로 교체하는 작업이다.

서울시가 이번 11개 시범구간의 신호등을 교체하는 데 쓴 비용은 6900만원. 전국의 신호등을 바꾸려면 예산 낭비가 되는 게 아니냐는 지적에 경찰 관계자는 “시범 지역이 아닌 일반 지역의 경우 노후로 인해 교체시기가 된 신호등에 한해서만 조금씩 바꿔 나갈 계획이어서 특별히 추가 예산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글=송지혜·김혜미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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