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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중수부 존폐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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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현재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중수부) 구상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5일 처음 거론됐다. 이인 법무장관은 이날 국회에서 “배를 불리는 고기는 가끔 이탈시키는 경향이 있다. 정치적 사회적이라든지 큰 압력이라든지 전제(專制)를 받아서 송사리만 붙잡도록 하는 까닭에 중대한 범죄를 놓친다면 치안유지가 곤란하다”고 말했다. 대검에 중대 범죄를 직접 수사하는 기구를 둬야 한다는 의미였다.

 당시는 수사기관의 불법 체포·고문 사례가 연일 신문에 보도될 때였다. 경찰, 군 방첩대·헌병대의 고문치사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인권 유린 문제는 대검으로 수사지휘계통을 일원화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49년 12월 공포된 검찰청법에 수사과·사찰과·특무과로 구성된 대검 중앙수사국이 등장한 배경이다. 이듬해 한국전쟁 발발로 연기되다 61년에야 발족됐다. 73년 특별수사부로, 전두환 정권 출범 직후인 81년 중앙수사부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른다.

 중수부에는 영욕이 교차한다.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82년), 5공 비리(88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9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 구속(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홍업·홍걸씨 구속(2002년) 등 사회를 뒤흔든 대형 사건은 중수부의 칼을 거쳤다. ‘성역 없는 수사’의 대명사로 떠올랐던 적도 있다. 반면 ‘정치 검찰’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도 따라다녔다.

 김대중 정권은 ‘공직자비리수사처’를, 노무현 정권은 ‘공직자부패수사처’를 신설해 중수부를 없애려 했다. 노 전 대통령 때 해체 위기에 몰렸던 중수부는 ‘차떼기’란 조어를 만들어낸 불법 대선자금 사건 수사(2003년)로 기사회생했다. 안대희 당시 중수부장(현 대법관)은 ‘국민 검사’란 애칭을 얻기도 했다.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이 “중수부 수사가 지탄받으면 내 목을 먼저 치겠다”며 대놓고 반발해도 정권이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중수부 인기는 대단했다.

 중수부 존폐론이 뜨겁다. 중수부는 검찰총장의 직할부대로서 검찰의 상징적인 조직이다. ‘정치 검찰’의 폐지론과 거악(巨惡) 척결의 유지론이 맞선다. “검사가 활동하기에 시민은 평온을 누린다”는 프랑스 사상가 몽테스키외(Montesquieu)의 말과 달리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예전에 비해 차갑다. 중수부의 생사, 결국 민심에 달렸다.

고대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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