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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춘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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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동양화가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은 다도(茶道)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해방 후 광주 무등산 자락에 차 밭을 일군다. 여기서 나온 차가 이름하여 춘설차(春雪茶)다. 남송(南宋)시대 나대경(羅大經)의 ‘한 사발의 춘설(春雪)이 제호(醍醐 )보다 낫다’는 시에서 따왔다. 제호는 우유를 정제할 때 나오는 극상품이다. ‘제호상미(醍醐上味)’는 불교에서 가장 숭고한 부처의 경지를 의미한다. 봄눈 녹듯이 스러지는 찰나 같은 인생 한 모금을 찬탄함인가. 아니면 봄꽃과 눈꽃이 어우러진 ‘생극(生剋)’의 오묘함을 상찬한 것인가. 봄눈 머금고 새순을 틔운 찻잎에 붙인 절묘한 이름이다.

 봄에 내리는 눈은 안타까움이다. 시인 김춘수는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三月)에 눈이 온다’고 운(韻)을 뗀다. 춘설은 ‘봄을 바라고 서 있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靜脈)을 바르르 떨게 하고, 또 이를 어루만지며,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서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고 했다. 샤갈은 러시아 출신 화가다. 첫사랑은 8살 연하의 벨라인데,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검은 장갑을 낀 신부’의 주인공이다. 샤갈은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로 향하지만 눈 덮인 고향과 연인을 잊을 수 없었다. 그때 그림이 ‘나와 마을’로, 분할기법을 도입한 화폭에 고향에 대한 애틋한 희망과 열띤 그리움이 담겨 있다. 바로 김춘수의 시 ‘샤갈…’의 모티프가 된 작품이다.

 그런데 춘삼월도 아니고 봄꽃들이 아우성치는 춘사월, 영동 지역에 대설주의보와 함께 폭설이 쏟아졌다. 봄 눈발이 장독을 깬다지만, 한편으로는 봄눈과 숙모의 매는 무섭지 않다고 했다. 한 자 깊이 쌓인 폭설도 한 자락 봄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강원도에 눈꽃이 만발한 가운데 서울 여의도엔 벚꽃이 만개했다. 법정스님은 “매화는 반쯤 핀 것이, 벚꽃은 활짝 핀 것이, 복사꽃은 멀리서 봐야, 배꽃은 자세히 들여다봐야 자태가 아름답다”고 했다. 철 잃은 눈꽃이야 봄 가뭄이라도 풀어주지만, 밤 잃은 벚꽃은 잠 못 드는 젊은 영혼의 애만 태우나.

 잎이 먼저 나오고 꽃이 핀다. 봄꽃은 지난해 잎에서 생성된 개화(開花)호르몬이 천천히 작용해 마치 새봄에 꽃부터 핀 것처럼 착시(錯視)를 일으킨다. 이 개화호르몬이 사람들 가슴에도 작용해 겨우내 쌓여 잔설(殘雪)로 남은 갈등일랑 봄눈 녹듯 사라지고, 희망의 꽃이 활짝 피기를 기원한다.

박종권 선임기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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