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스타열전 (10) - 마이크 피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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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박찬호의 경기를 본 야구팬이라면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불 같은 강속구를 받아내던 육중한 체구와 호남형 외모의 한 포수를 기억하리라. 바로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의 공격형 포수 마이크 피아자로서 그 당시 한국의 야구팬들에겐 메이저리그선수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스타중의 스타이다.

올 시즌 아메리칸 리그 MVP에 오른 이반 로드리게즈가 공,수,주를 완벽히 겸비하여 최고의 포수로 떠올랐다면 2~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메이저리그 팬들은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마이크 피아자가 최고의 포수라고 평가했었다.

피아자의 타격 특징 중 하나는 밀어치기에 상당히 능하다는 점인데 올 시즌 40개의 홈런 중 9개가 우측으로 넘어가 4개당 1개꼴의 우월홈런을 양산 시키며 휴스턴의 제프 백웰과 함께 밀어치기 재질이 뛰어한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커다란 등치에 어울리게 고비 때마다 터지는 장타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포수로서 수비능력은 다른 수준급 포수들에 비해서는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특히 변화구에 대한 블로킹 능력이나 도루저지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게 ‘종합적 포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미비한 부분이기도 하다.

피아자의 입단에 대해서는 많은 팬들에게 알려져 있듯이 피아자의 아버지 빈스 피아자는 대단한 석유 재벌로서 아들의 야구에 대한 열의를 파악하고 메이저리그에 아들을 입단시키려했지만 각 구단들이 관심을 갖지 않자 평소 친분이 깊었던 다저스의 라소다 감독에게 부탁했다. 그리하여 피아자는 88년 계약금 1만5천달러를 받으며 신인 드래프트에서 62번째로 뽑혔지만 이에도 구단측에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었다. 피아자는 당시 1,433명의 선수 중에 1,390번째로 뽑혔을 정도로 거의 주목 받지 못하는 선수였다

몇 년을 마이너리그에서 전전하다가 92년 다저스에서 빅리그 선수생활을 시작한 피아자는 21게임에만 출전하며 빅리그의 ‘맛’만 보았지만 93년 149게임에 출전, 0.318의 타율에 35홈런, 112 타점을 기록하며 당당 신인왕에 오르면서 92년 팀선배 에릭 케로스의 신인왕 수상에 이어 다저스의 2년 연속 신인왕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후 94년부터 97년까지 다저스에서 매년 3할대의 타율(0.319, 0.346, 0.336, 0.362)에 이 동안 평균 33개의 홈런과 5할이상의 장타율을 기록하면서 몬데시와 함께 타선의 핵으로 다저스를 이끌어왔다. 특히 박찬호선수와 베터리를 이루었던 97년에는 0.362의 타율에 생애 처음으로 40개의 홈런과 124타점, 201개의 안타를 기록하면서 래리 워커(콜로라도)에 아깝게 MVP를 넘겨줄 만큼 커다란 활약을 했지만 팀이 샌프란시스코에 밀려 지구우승을 놓치는 바람에 빛 바랜 기록이 되고 말았다.

98년 다저스의 프렌차이즈 플레이어 피아자에게 트레이드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칼이 드리워졌다. 다저스에서 시즌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5월 15일에 플로리다로 트레이드된 후 5월 22일에 다시 메츠로 트레이드되며 한 시즌에 3개 팀을 거치는 신세가 되었었다. 잦은 트레이드 탓에 컨디션을 잃은 것 같던 피아자는 다시 살아나 0.328의 타율에 32개의 홈런을 쳐내면서 이름값을 하며 98’ 시즌을 맞쳤다.

올 시즌 피아자는 40개의 홈런과 124타점의 높은 팀공헌도를 보여주었고 이에 팀이 신시내티를 한 게임차로 따돌리며 와일드카드를 따내는데 일등공신이 되어 포스트시즌에서도 활약이 기대되었었다. 하지만 디비전시리즈 1차전에서 엄지손가락 부상을 당하며 토드 프렛에게 포수자리를 내주었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서도 부상에 따른 컨디션 난조로 인한 방망이 부진과 3차전에서의 결정적 송구미스로 팀의 패배에 주역이 되었었다.

하지만 피아자는 스타성과 뛰어난 타격재질로 더욱더 많은 팬들을 메츠의 홈구장으로 불러들이는 동시에 작년에 못다 이룬 월드시리즈 진출, 더 나아가 월드시리즈 우승의 꿈을 이루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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