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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물, 태초에 없던 색을 입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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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유전자 변형 대신 육종 교배로 개발된 다양한 색깔의 옥수수들. 색깔의 ‘연금술사’들에 의해 과거엔 상상하지 못했던 ‘기이한’ 색상의 농산물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사진=김도훈 기자]


먹을거리에 색(色)을 입히면 오감을 자극한다. 평범한 식자재가 건강성분이 풍부한 감성·웰빙식품으로 재탄생한다. 요즘 농업의 새로운 돌파구로 주목받고 있는 감성(感性)농업에 관한 얘기다. 가격·품질을 주로 따지던 소비자의 시선이 이제 색·디자인 등 감성으로 옮겨가면서 나타난 변화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속담은 식품의 컬러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에겐 든든한 우군이다. 맛·향보다 ‘감성언어’인색으로 소비자를 군침 돌게 한다는 것이 이들의 최종 목표다.

 식품의 ‘컬러풀 월드(colorful world)’는 주식인 쌀에서 시작된다. 컬러 쌀(유색미)은 흑색미·적색미·녹색미 등이 나와 있다. 이들은 본래 쌀 영양소에 더해 흑·적·녹의 색소에 담긴 건강성분까지 섭취할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오세관 연구사).


 흑색미엔 안토시아닌(포도 등 검붉은 색식품에 든 항산화 성분)과 식이섬유(변비 예방)가 일반 쌀보다 많다. 녹색미는 라이신(필수 아미노산의 일종, 쌀에 부족한 대표영양소) 함량이 일반 쌀에 비해 25~75% 높아 어린이 성장발육에 효과적이다. 컬러 쌀의 건강 효과가 입소문을 타면서 전체 논에서 유색벼의 재배 면적 비율이 2007년 0.1%에서 2008년 0.29%, 2010년 0.53%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검정보리도 있다. 전북 고창에서 재배돼 온 검정보리는 청보리 축제를 통해 관광객의 인기를 끌면서 지금은 가격이 쌀보다 1.5배나 비싸다. 짭짤한 농가소득원으로 자리 잡았다. 덩달아 고창의 검정보리 재배 면적도 10㏊(2007년)→100㏊(2009년)→180㏊(2010년)로 늘어났다.

 검정 토마토도 나왔다. 붉은 토마토에 비해 비타민 C는 1.4배, 베타카로틴은 2배, 라이코펜(항산화 성분)은 3배 이상 함유한다. 토마토는 노란색·오렌지색으로도 변신했다.

 과일도 고유의 색에서 벗어나 최근엔 ‘속까지 빨간 사과’(뉴질랜드산)가 선보였다. 기존의 사과는 겉이 빨갛고(또는 청색) 속살은 하얘 적색과 백색 식품 중 어느 쪽으로도 분류하기 힘들었으나 이런 고민을 덜어줬다. ‘속까지 빨간 사과’는 사과의 향·당도·맛을 유지하면서 안토시아닌·플라보노이드등 항산화 성분이 더 많이 들어있다. 농촌진흥청은 분홍색·노란색 포도, 주황색·붉은색배를 개발 중이다(농진청 국립농업과학원 김재현 기능성식품과장).

 감자·고구마·당근·양파·버섯 등도 색의 ‘연금술사’들에겐 흥미로운 ‘캔버스’다. 컬러 감자엔 일반(흰색) 감자엔 없는 안토시아닌이 많이 들어있다. 농진청이 개발한 유색감자 ‘자영’(보라색)·‘홍영’(붉은색)이 전립선암 세포에 강력한 억제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다. 겉과 속이 보라색인 ‘신자미’, 호박색인 ‘주황미’ 등 컬러 고구마도 개발됐다. 이들 고구마엔 안토시아닌·베타카로틴 등 항산화 성분이 다량 함유돼 있다.

 주황색인 당근은 노랑·보라·검정 등 다양한 색으로 변신했다. 당근만으로도 무지개색을 연출할 수 있을 정도다. 보라색 당근엔 일반 당근엔 부족한 안토시아닌·라이코펜이 많이 들어있다. 반면 일반 당근에 풍부한 노란색 색소인 베타카로틴은 상대적으로 적게 함유된 것으로 확인됐다(식량과학원 권영석 연구사). 기술적으로 당근의 색을 바꾸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다. 자연엔 다양한 색깔의 당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라색 당근을 개발한 권 연구사는 “너무 길쭉하거나 맛이 떨어지는 등의 보라색 원종(자연산) 당근의 품질을 우리 당근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이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고유의 황갈색 대신 자주색·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컬러 양파도 나왔다. 컬러 양파를 얻기 위해 농진청 연구팀은 양파의 야생종을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원산지인 중동에선 붉은색 양파, 인도에선 자주색 양파를 주로 먹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야생엔 다양한 색깔이 있어 농산물의 컬러화를 돕는다. 이들 중 유용한 것을 선발한 뒤 교배해 개량하는 데는 대개 10년 이상이 소요된다.

국립식량과학원이 지난해 G20 정상회담을 기념해 만든 논아트. 검은 벼로 글씨를 새겼다.


 농산물의 컬러화는 먹을거리를 통해 웰빙을 원하는 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 컬러로 번지는 들판이 건강으로 물드는 밥상을 창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소비자의 선호도에 민감하다. 육종보다 상대적으로 쉽게 색을 바꿀 수 있는 유전자변형(GM) 기술이 배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양한 컬러 작물의 창조는 ‘곡물 아트’ 와 ‘논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 영역을 추가시켰다. 논 아트는 규모가 크다. 30m×200m크기의 작품도 있다. 보통 5∼6월에 시작되며 작품 감상의 최적 시기는 벼가 논에서 무르익는 가을이다. 농진청 녹색미래전략팀 이철희 연구사는 “논 아트는 논이 캔버스가 되고 녹색과 흑색 벼가 물감이 된다”며 “농산물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모양과 색깔이란 훌륭한 디자인 요소를 활용하면 다양한 상품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다.

 지난해 식량과학원은 경남 밀양, 전북 익산, 충남 아산 등 세 곳의 철로변에 논 아트작품을 전시했다. 식량과학원으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은 지자체에서도 지난해 40여곳에서 논 아트를 선보였다.

 곡물 아트는 쌀·보리·콩·팥·녹두 등 곡물의 종자를 이용해 그림이나 홍보 문구를 표현하는 것이다. 곡물 아티스트라는 신종 직업까지 배출했다. 지난해 주요 20개국(G20)정상회의를 기념해 식량과학원이 G20 국가들의 국기를 곡물종자를 이용해 그린 것이 곡물 아트의 한 예다. 크기는 보통 가로·세로 30∼40㎝와 60㎝ 정도다.

 콩과 팥으로 쥐 모양의 그림을 그린 ‘콩쥐팥쥐’도 곡물 아트에 속한다. 곡물 아트 작품은 마른 곡물을 이용하므로 벌레 먹는 것만 잘 막으면 10년 이상 보전이 가능하다. 식량과학원 전혜경 원장은 “기존의 농산물에 요즘 키워드인 웰빙·아트를 접목시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것 같다”며 “이 같은 창조적 작업이 농업을 고부가가치 미래 산업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글=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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