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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 믿고 경쟁자 우습게 보다 핀란드 경제까지 휘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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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두 달이 조금 지난 1939년 11월 30일 소련은 핀란드를 침공했다. 소련군은 3200여 대의 전차를 포함한 46만 명의 보병과 3800여 대의 항공기를 갖췄다. 이에 맞서는 핀란드군은 전차 33대, 항공기 110대에 총 병력이 34만 명에 불과했다. 스탈린은 그해 안에 핀란드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핀란드제 수오미 기관단총과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별명의 화염병으로 무장한 핀란드군은 끈질긴 매복·기습 공격으로 소련군을 괴롭혔다.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 ‘겨울 전쟁’에서 최소한 12만7000명의 소련군이 숨졌다. 핀란드군 사망자는 약 2만7000명. 탄환이 바닥난 핀란드는 1940년 3월 소련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 결과 국토의 10%를 잃었지만 이웃한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과는 달리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핀란드 국민이 단합해 보여준 투혼은 ‘겨울 전쟁 정신’이라 불린다. 인구 500만 명의 핀란드가 ‘작지만 강한 나라’라는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핀란드는 겨울 전쟁 이후 두 번째 위기를 겪고 있다. 이번에는 스마트폰이 문제다. 20년 이상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영원한 선두’를 유지하던 노키아가 애플발 ‘스마트폰 쇼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휘청이고 있다. 이 회사는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25%, 전체 고용의 10%를 차지한다. 노키아가 몰락하면 ‘강소국의 교과서’라는 핀란드 역시 타격을 피할 수 없다. 도대체 노키아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2015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0.1%”
600년간의 스웨덴 지배와 러시아의 100년 지배를 받은 핀란드는 1917년 독립했다. 하지만 자작나무 숲을 활용한 펄프·제지 산업을 제외하고는 변변한 산업 기반조차 없는 유럽의 변방국이었다. 핀란드의 변신은 노키아의 도약과 궤를 같이한다. 1865년 펄프회사로 출발한 노키아는 전선·타이어·컴퓨터·TV 등에 손을 댔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다. 88년에는 파산 위기에 처해 최고경영자(CEO)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변화의 계기는 ‘젊은 피’ 수혈에서 시작됐다. 92년 42세의 나이로 CEO에 오른 요르마 올릴라는 휴대전화를 제외한 모든 사업을 정리했다. 과감한 연구개발(R&D) 투자로 원천기술을 확보했다. 핀란드 정부도 적극적으로 도왔다. 70년대 핀란드 국영연구소가 개발한 2세대 이동통신기술(GSM)을 10만 유로(1억5000만원)에 노키아에 팔았다. GSM은 유럽의 표준이 됐고 노키아는 세계 1위 업체로 발돋움했다. 90년대 이후 세계시장 점유율이 40%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올릴라는 핀란드에서 대통령보다 더 존경받는 기업인이 됐다.

잘나가던 노키아는 2007년 암초를 만났다.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은 것이다. 애플의 CEO인 스티브 잡스는 당초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1%를 차지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스마트폰 시장은 노키아의 자체 운영체제(OS)인 ‘심비안’을 탑재한 제품이 60%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이었다. 잡스의 기대는 “무모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결과는 딴판이었다. 애플은 아이폰·아이폰3G·아이폰4로 이어지는 스마트폰을 연속으로 히트시켰다. 지난해만 4200만 대를 팔아 스마트폰 시장의 15.7%를 차지했다. 반면 심비안의 점유율은 나날이 떨어졌다. 올해 19.2%, 2015년에는 0.1%까지 낮아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급성장하는 시장에서 죽을 쑤니 전체 실적도 하락세다. 전체 휴대전화 시장에서 노키아의 점유율은 2009년 36%로 처음으로 40%를 밑돌더니 지난해 29%까지 추락했다. 더 심각한 것은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는 점이다. 2007년 80억 유로에 달하던 영업이익은 2009년 20억 유로에도 미치지 못했다. 주가도 급락했다. 2007년만 해도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40달러에 거래되던 노키아의 주식예탁증서(ADR) 가격은 2009년 이후 8달러 수준에 그치고 있다. 급기야 이달 들어 노키아의 시가총액이 대만의 신흥 스마트폰 제조업체인 HTC에도 뒤지는 상황이 됐다.

뉴욕 타임스는 “노키아 몰락의 원인은 관료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조직이 커지면서 고객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실무진과 경영진의 단절 현상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터치스크린·애플리케이션 등 핵심 영역에서 뒤처졌고, 저가 모델의 대량 생산을 통한 점유율 유지에 급급했다는 것이다.

노키아가 흔들리니 핀란드 경제도 편치 못하다.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까지 겹치며 2009년 핀란드의 GDP는 8.2% 하락했다. 2008년 6.8%이던 실업률도 10.5%까지 치솟았다.

“소비자·실무진에 귀 막은 관료주의 문제”
노키아의 신임 CEO인 스티븐 엘롭(사진)은 올 2월 전 직원에게 보낸 글에서 “불타는 플랫폼에서 뛰어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전에 불이 났는데 우물쭈물하다 바다로 뛰어들지 않으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실낱같은 가능성조차 없어진다는 것이다. 노키아 특유의 느긋한 문화에도 일침을 놨다. 엘롭은 “우리는 2007년 첫선을 보인 아이폰 수준의 제품이 아직도 없다”고 개탄했다.

중저가 시장에서도 위기다. 앨롭은 “겨우 2년 전 첫선을 보인 구글 안드로이드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우리를 추월하려고 한다”며 “지금까지처럼 한다면 우리는 점점 뒤처지고, 경쟁자들은 점점 앞서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캐나다 출신으로 MS에서 일하던 엘롭은 올해부터 노키아의 CEO를 맡았다. 처음으로 핀란드인이 아닌 노키아 사령탑이다.

엘롭의 첫 대책은 MS와 손잡는 것이었다. 윈도폰7을 심비안을 대신할 차세대 주력 제품으로 삼은 것이다. 노키아와 MS는 이달 말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발표한다.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에도 나섰다. 앤티 린느 핀란드 사무직노동조합 대표는 “노키아 전체 R&D 인력 중 38%에 달하는 6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고 말했다.

핀란드에서는 구조조정을 하려면 노동조합과 합의를 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달부터 노조와의 교섭이 교착 상태에 빠진 데다, 하도급 업체 근로자들까지 들고 일어나며 엘롭의 개혁은 진퇴양난에 빠진 모습이다. 노키아는 “구체적인 감원 규모는 정한 바 없다”며 흔들리는 조직을 다독이고 나섰다. 12일에는 심비안의 업데이트 버전을 발표하며 “최소한 앞으로 1년 반은 심비안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내놓은 N900 등 심비안 모델들의 판매량이 급격히 하락하고, 심비안 개발자의 이탈 현상이 나타나자 내놓은 고육지책이다.

핀란드는 뛰어난 인력과 기술을 모아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일구는 강소국 모델로 관심을 끌었다. 지난 20년간 노키아 덕분에 생긴 회사만 수백 개에 달하고, 이로 인해 4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마련됐다. 하지만 휘청거리는 노키아는 이 같은 전략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특히 급변하는 IT산업에서는 이런 위험성이 더 커질 수 있다.

핀란드에서도 노키아에만 기대지 말고 새로운 기술과 산업으로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취임한 41세의 여성 총리 마리 키비니에미는 “잔디밭이 말라버리면 더 많은 물을 줄 필요가 있고, 필요하다면 새로운 씨도 뿌려야 한다”고 말했다.

김창우·전수진 기자 kcwsss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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