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부실대출, 우리만 책임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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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사는 아파트는 그렇다쳐요. 11대 종손인 내 이름으로 돼 있는 선산(先山)까지 내놓으라니 이럴 수 있습니까. "

퇴출된 D은행 임원이었던 K모씨는 최근 예금보험공사로부터 재산가압류 통보를 받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부실대출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당국의 서슬이 무서워 한사코 익명을 요구한 그는 한숨만 내쉬었다.

"망할 게 확실한 기업에 대출해줄 만큼 배짱있는 은행원이 몇명이나 되겠습니까. 당시엔 괜찮은 기업이라 대출을 했는데, 결과만 보고 부실대출 여부를 판정한다면 누가 소신있게 대출해줄 수 있겠습니까. "

금융계가 술렁이고 있다. 지난 연말 예금보험공사가 전격적으로 퇴출 금융기관 임직원 2백29명에게 재산가압류 조치를 내렸기 때문. 이미 두차례 같은 조치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대상이 많지는 않았다.

더구나 예보가 퇴출 금융기관 임직원에 물은 책임의 대부분은 부실대출이었다. 횡령처럼 불법행위를 안해도 대출이 잘못되면 퇴직금은 커녕 전재산을 날릴 수 있다는 얘기다.

◇ 금융계의 항변〓외환위기 사태라는 특수상황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아부도로 함께 쓰러진 A종금사 임원 K씨는 "97년 이전에 기아가 부도날 것이라고 예측했던 사람이 누가 있었느냐" 고 주장했다.

퇴출된 충청은행 임원 L씨는 "우리 은행이 대출해줬던 영진약품.마산종합건설 등은 지금 잣대로 보면 부실기업이지만 외환위기가 아니었다면 부도날 회사들이 아니었다" 면서 "지난 1년간 수차례 검찰에 불려갔지만 불법대출은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고 강조했다.

대출 압력을 넣은 정치권이나 지방자치단체장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B지방은행 출신 H씨는 "부실기업에 대출을 해줄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누구보다 우리가 잘 알았다" 며 "그러나 지방은행 인사에 영향력이 컸던 사람들의 청탁을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고 하소연했다.

이 때문에 퇴출 금융기관 임직원들은 집단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예보가 재산가압류 대상자들에게 ▶퇴출 은행은 4~10일▶퇴출 보험사는 17~21일▶퇴출 종금 등은 21~29일까지 소명 기회를 줬지만 개별적으로는 응하지 말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 충청은행 L씨는 "동료들과 소송문제도 의논하고 있다" 고 말했다.

◇ 긴장하는 금융가〓 '살아 남은' 금융기관 임직원도 마음은 편치 않다. 예보가 공적자금이 들어간 은행은 모두 부실대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감원도 공적자금을 넣은 은행들은 차례로 특별검사를 벌여 문책하고 있다. 또 한차례 은행 합병바람이 예상되는 마당에 가벼운 문책이라도 받아놓으면 감원대상 1순위에 오를 게 뻔하다.

대우 워크아웃을 담당하고 있는 A시중은행 간부는 "대우 처리만 해도 모든 일을 정부와 협의하고 있지만 표면적으론 은행 자율로 하고 있다" 면서 "문제가 생기면 은행원이 다 뒤집어 쓰는 것 아니냐" 며 불안해했다.

◇ 당국 입장과 전문가 의견〓예보의 최성국 채권조사실장은 "딱한 사정도 있지만 공평하게 하기 위해선 규정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고 설명했다.

그는 "재산가압류 조치 전에 소명 기회를 줬다" 며 "그래도 억울한 사람은 소송을 통해 구제받을 길도 있다" 고 덧붙였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시민입법국 김영재 간사는 "금융기관 임직원들의 무책임한 경영행태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단호한 조치가 불가피하다" 며 "금융기관 임직원뿐 아니라 대주주나 대출을 받은 기업주의 책임도 엄격히 물어야 한다" 고 강조했다.

그러나 지나친 책임추궁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김병연(金炳淵)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도가 지나치면 금융이 위축돼 중소기업만 피해를 볼 수 있는 만큼 책임범위를 분명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횡령처럼 범법행위나 반드시 거쳤어야 할 절차를 빠뜨린 것과 같은 명백한 과실에 대해서만 처벌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금융기관들도 이런 부담을 덜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대출 신청자의 신용상태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대출 가능여부와 한도가 계산되도록 하는 시스템을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거액 대출의 경우 대출심사위원회와 같은 합의제 조직에서 결정을 내리도록 하면서 위험을 분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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