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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14)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눈물 5

더 이상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나의 말굽과, 완전히 합쳐졌다는 느낌은 뜻밖에 나를 기쁘게 했다.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나는 말굽이다아!”라고, 세상천지를 향해 소리치고 싶기도 했다.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할 일을 정했다기보다, 말굽으로부터 할 일을 부여받은 것 같았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사고(思考)를 다스리는 사고가 너의 힘찬 말(馬)이고/ 네 몸이 신들로 가득 찬 너의 사원’이라고 읊은 어떤 현자의 선시를 나는 기억했다. 그랬다. 나에게 생각은 없었으나, 생각을 다스리는 생각이, 말굽과 한 몸뚱어리 된 나의 모든 스케줄을 이미 결정해놓았다는 것을 나는 알아차렸다. “아, 드디어 나는 말이 되었다!” 나는 제왕처럼, 이상야릇한 희열에 차서 부르짖었다. 나는 말이었고, 터미네이터였으며, 터미네이터처럼 만들어진 말이었다.

머지않아 여명이 터올 시각이었다.
샹그리라는 고요했다. 나는 거의 발소리를 내지 않고 5층으로 올라갔다. 백주사가 기거하는 501호실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샹그리라 모든 방의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나는 갖고 있었다. 백주사의 방에 먼저 들르면 옷을 더럽히게 될 염려가 있었다. 깨끗한 옷을 입은 채 여린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501호실을 지나 복도 끝의 505호실, 여린의 방으로 갔다. 마스터 키는 잘 맞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시도했다.

문이 열렸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촉수 낮은 불빛에 어렴풋이 드러난 거실은 비어 있었다.
창가에 세워진 흔들의자와 탁자 위의 뜨개질 바구니가 먼저 들어왔다. 바구니의 털실들은 따뜻해 보였고 또 아름다웠다. 할 일이 없을 때, 그녀는 자주 창밖을 향해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곤 했다. 뜨개질하는 그녀를 암벽 위에 엎드려 내려다보는 일이 샹그리라에 들어온 후 내가 경험한 가장 행복하고 귀한 기억이었다. 열네 살 시절의 그녀도 뜨개질을 좋아했다. 그녀는 자기 집에 불이 나기 얼마 전부터 눈처럼 하얀 털실로 나의 가디건을 뜨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까진 완성할 수 있어. 성탄선물이야, 오빠!” 그녀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탁자 위에는 그녀가 뜨다 만 셔츠가 코바늘과 함께 놓여 있었는데, 카디건인지 어쩐지는 알 수 없었다. 흰색 털실이었다. 어스레한 불빛 아래에서도 털실의 하얀 빛은 충분한 명도를 갖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쓰다듬어보았다.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뜨개질바늘도 만져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내 말굽손은 털실과 코바늘의 차이조차 감지하지 못했다.

돌아서니 안마용 침대가 바라보였다.
침대 끝에 엉덩이를 걸친 그녀의 하반신이 생각났다. 백주사가 붙잡고 있던 가느댕댕한 다리와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은 발도 보이는 듯 선연했다. 고통스런 표정으로 피스톤 운동을 하고 있는 짐승의 이미지가 오버랩되었다.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그 대신 심술이 난 아이처럼, 나는 긴 뜨개질바늘로 그것을 쿡쿡 찔러보았다. 바늘이 쑥 들어가 침대 속살에 박히는 느낌이 좋았다. 팔까지 진출한 말굽이 뜨거워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침실로 이어진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뜨개바늘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침실까지 들어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침실 역시 어스레했다. ]

그녀는 옆으로 누운 채 가만히 잠들어 있었다.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백주사에 의해 침대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여자가 정말 그녀였을까. 커튼으로 가려져 얼굴을 확실히 본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녀를 내려다보려는데, 시선의 진행방향에서 걸려나온 다른 무엇이 그녀보다 먼저 내 눈을 끌어당겼다. 침대 머리맡 데스크에 놓인 나무 쟁반에 그것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무엇이지, 하고 미간을 모을 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전깃불이 팍 하고 켜지는 듯한 시그널이 왔다. “은…… 장도야.” 나는 중얼거렸다.
그것은, 정말 은장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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