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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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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생일에 한 후배가 『팜므 파탈』이란 책을 선물했다. 건네면서 하는 말이 ‘팜므 파탈’이 되란다.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했던 살로메나, 적장의 목을 자르던 유디트만큼 치명적으로 매혹적인 여자는 아니라도, 마음대로 사람을 조종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심리전의 고수가 돼 보란다. 혹시나 해서 그날 밤을 새워 책 한 권을 다 읽었지만 고수는커녕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랑은 거리가 먼 얘기였다. 권력을 가진 남자들의 눈을 멀게 하기 위해서 육체적인 자본이 있어야 함은 기본이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반윤리적인 것도 개의치 말아야 하는 ‘팜므 파탈’.

 요즘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뒤집어놓은 신정아와 많이도 닮았다. 1년6개월 전. 시작은 그저 ‘학력 위조’였다. 그러던 것이 차츰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하면서 사건의 본질은 뒤로 밀린 채 고위 관리와 나눈 불륜을 비롯한 그녀의 사생활이 발가벗겨져 언론의 도마 위에서 난도질당했던 것이다. 사건의 당사자가 만약 잘나가고 성공한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 아닌, 그저 평범한 남자의 학력 위조였더라도 언론에서 그리 크게 떠들었을까. ‘서류 위조’라는 본래의 죄와 하등 관계가 없는 사진을 놓고 ‘나체사진이다 합성이다’ 하며 싸워대지를 않나, ‘불륜의 현장이 광화문 일터에서 불과 몇m 떨어진 곳’이라며 법석을 떨지를 않나. 결국 그녀는 ‘옐로 저널리즘’의 피해자였던 것.

 1년 반이 지난 지금. 언론의 외설적인 칼날의 희생물이었던 그녀가 책 한 권을 들고는 씩씩하게 돌아왔다. 책을 통해 그녀는, 자기를 무참히 발가벗겼던 바로 그 언론을 이용해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신나게 발가벗기고 있다. 학력 위조를, 대필 운운하며 ‘박사논문을 제출했으니 도리를 다 했다’고 우기는 그 뻔뻔함은 우직하게 열심히 공부해 학위를 딴 수많은 사람을 우롱한다. 또한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은 여자가 ‘도덕관념은 제로’라고 남을 판단하는 것 자체도 매우 뻔뻔하다. 불륜 상대 남성과의 관계도 사랑했던 사이로 애써 포장을 해가며 이제 와서 디테일한 부분까지 낱낱이 묘사해 놓은 것을 보면 사랑보다는 처절한 복수란 생각이 들더라. X아저씨를 정말로 X아저씨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구매한 학위를 가지고도 손쉽게 교수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고 몸소 증명해 대학의 권위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일이나, 젊은 여자를 유인하고 농락을 일삼는 ‘권력남’들의 비틀린 욕망. 이런 것들을 모조리 까뒤집어 발가벗길 수 있었던 것은 더 잃을 것이 없는 그녀였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죽음으로써 ‘문제’를 제기했던 장자연이 있었다. 남은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그토록 절절하게 하고 싶었는지, 주민등록번호와 지장을 찍어가며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했을까.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이 그녀 말대로 나약하고 힘없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만이 최선이었을까.

 죽음이라는 아무런 효력도 없는 장자연의 수동적인 문제해결 방법보다는, 뻔뻔하지만 당찬 신정아의 적극적인 복수 방법이 더 통쾌한 이유는 뭘까.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