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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13)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눈물 4

오과장은 내가 처음 단식원을 들여다보던 날 죽인, 김실장과 한 방을 썼던 키 작은 남자의 다른 이름이었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제 아버지가 죽인 수많은 개처럼, 내가 삼단계 과정을 거치면서 죽어갈 운명에 놓인 게 확실했다. 두렵지는 않았다. 때리는 것만이 쾌락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때리는 것보다 맞아본 경험이 많았고, 그것이 주는 쾌락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목매달려 온몸을 몽둥이로 두들겨 맞으면서 죽어갈 때 맛볼 쾌락이 상상 속에서 느껴졌다. 철쭉의 부러진 가지 끝이 위에서 내려밟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피부를 뚫고 들어온 것 같았다. 뜨거운 피가 목을 적시고 흘렀다. 피 냄새도 나쁘지 않았다. 나쁘기는커녕 짜릿한 느낌이었다. 김실장이 내 손에서 장갑을 빼내고 있었다. 낯선 사람에 대한 낯가림을 견디지 못하고 나의 말굽은, 잔뜩 흥분해 솟아 올라와 있을 게 뻔했다.
샹그리라를 둘러싼 암벽이 오늘 밤 기어코 나의 묘비가 될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한참동안이나 실신해 있었던 게 확실했다. 본능적으로 목을 먼저 만져보았다. 피가 낭자했다. 철쭉의 뾰족한 가지에 뚫린 목에서 아직도 피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예상대로라면 나는 지금쯤 올가미에 목이 졸린 채 상수리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엎어져 있었고, 살아 있었다. 힘써 상반신을 일으켰다. 무엇인가, 죽은 짐승 같은 것이 내 앞에 널브러져 있는 게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헤드랜턴을 간신히 찾아 널브러진 그것을 비쳐보았다. 김실장이었다. 두개골이 깨져 함몰되고 목뼈가 부러진 듯, 얼굴이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한발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된 것인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은 철쭉 가지 끝이 목을 뚫고 들어온 것과 김실장이 내 손에서 장갑을 벗겨내고 있는 것에서 끝나 있었다. 그 뒤의 모든 기억은 캄캄했다. 나는 아마 정신줄을 놓은 상태에서 김실장과 한바탕 안고 뒤지기를 한 모양이었고, 그 과정에서 그의 머리를 쪼갠 뒤 목뼈를 부러뜨려 회전나사처럼 비틀어 놓은 것 같았다. 나의 온몸 또한 상처투성이였다. 이마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늑골이라도 부러졌는지 옆구리 역시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게다가 김실장의 살점이나 뇌수를 물어뜯어 삼켰던 듯도 했다. 피칠갑이 된 입안에 비릿한 살점과 뇌수 따위가 잔뜩 고여 있었다. 나는 퇴, 하고 입안의 것들을 뱉은 다음 철쭉 꽃잎을 한 움큼 훑어내어 질겅질겅 씹어 먹었다. 향긋했다.

뼈를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방으로 돌아왔다. 샹그리라의 모든 방은 다 불이 꺼져 있었다. 샤워를 먼저 했다. 샴푸와 향긋한 린스도 사용해 머리도 감아 빗었고, 옷도 갈아입었다. 고귀한 누군가를 만날 때 쓰려고 준비해두었던 샴푸였고 린스였으며 옷이었다. 머리칼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새 신부를 만나러 가는 첫날밤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리와 목의 상처에선 어느덧 피가 멈춰 있었다.
정신은 말짱했다. 정신만 말짱한 것이 아니었다. 시시각각 우주적인 에너지가 몸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것처럼 체력은 빠르게 회복됐고 정신은 맑아졌다. 뭔가에 의하여 깨끗이 정화된 기분이었다. 정신줄을 놓은 상태에서도, 김실장을 제압하고 살아난 것이 스스로 대견하기도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았다. 옆구리는 아팠으나 내부에서 생성돼 축적된 에너지가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울 앞에 서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말굽이 팔목으로부터 거의 한 뼘이나 올라와 있었다. 쇠로 토시를 만들어 낀 형국이었다. 특히 왼손의 말굽은 뾰족한 창날들이 흔적만 남은 손가락 끝까지 밀고 나와 그 자체로 하나의 톱날이 되어 있었다. 내려다보고 있는 순간조차 말굽은 세포분열을 하듯이 눈에 띄게 확장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이런 속도로 확장을 거듭한다면 말굽은 채 하루도 가기 전에 내 온몸을 잡아먹을 게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래. 너는 나와 한 몸뚱어리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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