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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 ‘롤스로이스’의 영원한 경쟁자, 괴짜 ‘벤틀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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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호 28면

벤틀리가 지난해 가을 선보인 신형 콘티넨털 GT. 지난해 11월 계약을 받기 시작했고, 국내에는 이달부터 들어온다. 2억 9100만원 선.

“당신 집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도대체 쉴 수가 없단 말이오.” 시름시름 앓던 이웃이 자동차 개발에 여념이 없던 월터 오언 벤틀리를 찾아와 따졌다. 벤틀리는 되레 호통을 쳤다. “죽기 전에 이처럼 위대한 차의 소리 듣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세요”라면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 전투기의 엔진을 설계한 엔지니어였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괴짜이기도 했다.

세계 3대 명차 벤틀리와 함께한 시간여행

벤틀리는 월터 오언 벤틀리가 1912년 영국에서 창업한 주문제작차 회사다. 기술 욕심이 남달랐던 그는 설립 초기부터 화끈한 성능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당시 유럽 최고의 자동차 경주였던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를 휩쓸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영국 롤스로이스, 독일 마이바흐와 함께 세계 3대 명차로 꼽힌다.

그러나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로 자금줄이 묶였다. 1931년 벤틀리는 결국 롤스로이스로 넘어갔다. 롤스로이스는 한때 라이벌이었던 벤틀리의 정체성을 철저히 지웠다. 벤틀리의 기존 공장을 폐쇄했다. 나아가 전 차종을 스포티하게 바꿨다. 롤스로이스의 이란성 쌍둥이로 각색하고 포장했다. 현대차에 갓 인수됐을 무렵의 기아차와 비슷한 신세였다. 월터 오언 벤틀리도 쓸쓸히 회사를 떠났다. 1920년대를 풍미했던 벤틀리의 신화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1929년 형 ‘스피드식스’

그런데 1997년 롤스로이스의 자동차 사업부문이 불황에 못 이겨 매물로 나왔다. 한 지붕 식구 벤틀리도 덩달아 운명의 갈림길에 섰다. 인수전에서 폴크스바겐과 BMW가 맞붙었다. 호화로우면서도 스포티한 이미지를 높게 샀기 때문이다. 인수우선권은 롤스로이스에 12기통 엔진 기술을 전수했던 BMW가 쥐었다. 하지만 치열한 협상 끝에 폴크스바겐이 벤틀리 상표권과 롤스로이스 공장을 거머쥐었다. BMW는 무형의 자산인 롤스로이스 상표권만 헐값에 사들였다.

폴크스바겐의 품에서 벤틀리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린다. 폴크스바겐의 최신 기술을 수혈받는 한편 자신만의 개성을 되찾았다. 한 해 고작 몇 백대 찍던 롤스로이스 시절과 달리 2007년에 1만 대의 벽을 넘어섰다.

그런데 미국 서브 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촉발된 금융위기가 벤틀리의 최대 시장 미국을 덮쳤다. 판매는 순식간에 반 토막 났다. 2008년 7600대, 2009년엔 4660대까지 떨어졌다. 회사를 구하기 위해 벤틀리 전 직원이 발 벗고 나섰다. 급여를 10% 삭감하고 수당 없이 잔업에 나섰다. 동시에 정규직의 추가 고용은 최대한 억제했다.

회사가 어수선했지만 신차 개발 스케줄만은 철저히 지켰다. 이제 그 결실이 하나씩 나오고 있다. 지난해 봄 최고급 세단 ‘뮬산’을 공개했다. V8 6.75L 엔진을 얹고 한때 점령군이었던 롤스로이스의 ‘고스트’와 맞대결을 펼치고 있다. 뮬산은 수제작으로 생산된다. 한 대 만드는 데 500시간이 걸린다. 차체 컬러는 11가지나 된다. 카펫 컬러만 24가지다.

지난해 가을 벤틀리는 신형 ‘콘티넨털 GT’를 내놨다. 콘티넨털 GT는 폴크스바겐 품에서 개발한 첫 차로, 벤틀리의 화려한 부활을 이끌고 있다. 대지진이 일본을 강타하기 직전, 도쿄에서 아시아 최초로 공개된 신형 콘티넨털 GT를 만났다. 12기통 6.0L 트윈터보 엔진과 6단 자동변속기, AWD 방식인 점까진 이전과 판박이다.

하지만 안팎 디자인이 바뀌었다. 눈매엔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LED를 둘렀다. 과거 경주차의 분위기를 담은 격자무늬 그릴은 이전보다 치켜세웠다. 범퍼 디자인도 바꿨다. 테일램프는 보다 넓적해졌다. 인테리어는 가죽과 자연산 원목, 알루미늄 패널로 꾸몄다. 터치스크린 모니터도 심었다. 시트의 디자인을 바꾸면서 실내공간도 한층 여유로워졌다.

출력은 15마력, 토크는 8%나 치솟았다. 엔진 부품의 무게를 줄이고 마찰을 낮춘 결과다. 변속기도 한층 민첩해졌다. 급가속 땐 두 단을 성큼 내려서는 기능도 담았다. 그 결과 엔진의 반응이 빨라졌고 고속에서의 가속이 힘차졌다. 65㎏의 다이어트에도 성공했다. 575마력의 최고출력과 ‘제로백’ 4.6초, 최고속도 시속 318㎞ 등의 수치만 보면 영락없는 수퍼카다.

그러나 자칫 흉기가 될 수 있는 괴력은 벤틀리란 여과막을 거치면서 넉넉하고 부드러운 힘으로 승화됐다. 따라서 운전이 놀이처럼 즐겁고 휴식처럼 편안하다. 벤틀리의 매력은 뜨거운 성능을 푸근한 감각으로 소화해내는 데 있다. 신형 콘티넨털 GT의 가격은 2억9100만원이다. 지난해 11월 계약을 받기 시작했고, 이달부터 국내에 들어온다.

일본 도쿄 인근에는 벤틀리와 롤스로이스만 모아둔 박물관이 있다. 영국차 매니어인 기요하루 와쿠이가 운영하는 곳인데, 20세기 초중반의 벤틀리와 롤스로이스가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그는 벤틀리와 롤스로이스 가운데 벤틀리에 더 애착을 갖고 있다. “벤틀리는 불과 13년 동안만 독립 기업으로 존재했습니다. 이후엔 롤스로이스에 합병됐으니까요. 그런데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르망 레이스의 우승컵을 다섯 차례나 거머쥐었어요. 당시의 차와 비교할 때 정말 놀랍도록 빨랐죠.” 기요하루는 롤스로이스를 ‘완벽주의의 산물’이라고 정의했다. 바늘로 찔러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구석구석까지 완벽을 추구했다고.

반면 “벤틀리는 장난꾸러기 같다”고 비유했다. 거들먹거리고 때론 거칠다. 남성적이다. 그래서 모범생 같은 롤스로이스보다 벤틀리에 더 마음이 끌린단다. 갑자기 박물관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기요하루와 밖으로 나서니 직원들이 앞마당에 서 있던 1929년형 벤틀리 6과2분의1L 스피드식스의 커버를 조심스레 벗기고 있었다. 롤스로이스로 인수되기 직전, 벤틀리에 두 번의 르망 우승을 안긴 경주차였다. 운전대는 기요하루가 직접 쥐었다. 벤틀리 드라이버스 클럽의 회원다운 모습이었다.

그가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탱크 소리 같은 굉음과 함께 트럭만 한 차체가 튀어나갔다. 82년이나 된 차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쌩쌩 달리는 벤틀리 스피드식스는 경이로웠다.

과거와 현재의 벤틀리엔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신형 콘티넨털 GT의 옆면은 1954년형 ‘R-타입 콘티넨털’의 오마주였다. ‘당대 최고의 성능을 편안함 속에 담겠다’는 원칙 또한 한결같았다. 영국인 특유의 위트도 변함없다. 날개 모양의 엠블럼이 대표적이다. 유심히 살펴보면 좌우 깃털의 개수가 다르다. 안일한 모방의 허를 찌르기 위한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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