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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분수대

북한 신사유람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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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후발주자가 선두를 따라잡을 때 많이 쓰는 게 벤치마킹이다. 18세기까지 미개한 나라로 천대받던 제정러시아가 일어선 것도 벤치마킹 덕이었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계몽군주를 만나면서 확 달라졌다. 그는 서유럽 벤치마킹이 후진국 탈출의 첩경이라고 믿고 1697년 250여 명으로 구성된 해외시찰단을 꾸린다. 이렇게 출범한 ‘대사절단’은 1년 반 동안 네덜란드·영국·독일·오스트리아를 돌며 서구 문물을 익혔다. 25세였던 표트르도 하인으로 위장, 대사절단에 낀다. 2m가 넘는 장신 탓에 정체가 들통났지만 허름한 목수로 변장,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직접 배를 만들기도 했다. 또 영국 의사당을 방문, 회의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렇듯 서구 문물을 샅샅이 본 그는 귀국 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정략결혼을 없애고 수염을 밀게 한 것도 이 일환이었다.

 일본도 170여 년 후 해외시찰단을 파견한다. 일본 체류 중이던 네덜란드 선교사 귀도 베르덱이 표트르처럼 해외시찰단을 보내자고 건의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외무대신인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인솔,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불렸던 이 팀은 1871년부터 22개월간 미국을 시작으로 50여 명이 12개국을 돌았다. 한반도 침략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도 멤버였다. 여기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일본은 예산의 2%를 여비로 썼다. 한국의 올 예산(309조원) 규모로 환산하면 6조원을 쓴 셈이다.

 한국판 해외시찰단은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신사유람단’이다. 이들 62명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놀러 가는 유람단이라고 자신들을 불렀으며 부산까진 암행어사 일행으로 위장했다. 또 일본에서는 몇 명씩 민박을 했다. 그러나 대번에 눈치를 챈 일본 당국은 고위직까지 나서 이들을 환대하며 많은 것을 보여줬다. 이 덕에 신사유람단 멤버들은 넉 달간 일본 전역을 둘러본 뒤 귀국, 개화정책의 선두에 선다. 요즘엔 한국 문물을 보겠다는 아시아·아프리카의 해외시찰단이 몰려와 세상 변화를 실감케 한다.

 북한 경제대표단 12명이 2주간 미국 자본주의를 흠뻑 음미하고 3일 귀국했다 한다. 이들은 월스트리트·실리콘밸리에다 놀이공원인 유니버설 스튜디오까지 돌아봤다. 유명했던 해외시찰단의 공통점은 이들의 귀국 후 대대적인 개혁이 뒤따랐다는 거다. 지도자의 의지가 중요하지만 이들이 보고 들은 바가 퍼져 북한 내 변화의 훈풍이 불길 기대해 본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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