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쓰나미와 우상숭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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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지난달 일본 대지진 참사 소식을 처음 접하던 순간, 괜한 걱정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2004년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들이닥치자 냉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내뱉은 어느 목회자의 설교가 기억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개신교 원로 한 분의 입에서 걱정스럽던 한마디가 종내 흘러나오고 말았다.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간 일본 국민에게 하나님이 내린 경고라고 생각된다.”

 저 숱한 희생자들에게는 안타깝게도 그 경고가 때늦은 것일 터인즉, 하나님은 그 고귀한 생명들을 살아남은 일본인들에 대한 경고의 ‘수단’으로 사용한 셈이 되겠다. 이것이 그 원로 목회자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의 모습인가?

 자연재해가 수많은 생명을 덮칠 때마다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 하나와 마주치곤 한다. “전능한 신, 자비의 하나님은 왜 자신의 피조물들을 처참한 고통 속에 방치하시는가?” 이 오래된 질문에는 역시 오래된 대답 하나가 에피쿠로스에 의해 이미 준비돼 있다. “신이 있다면, 세상의 악은 어디서 오는가? 신이 악을 제거할 의지가 없다면 선하지 않고, 악을 제거할 능력이 없다면 전능하지 않다. 선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왜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경건한 신앙인의 마음에도 의혹은 찾아든다. 예수회 신부인 테야르 드샤르댕은 ‘숨어있는 신(Deus Absconditus)’을 향해 이렇게 절규했다. “신이여, 진정 당신이 계시다면, 절망 속에서 구원을 호소하는 피조물들에게 당신이 해주실 일은 당신의 눈빛을, 당신의 옷깃을 흘깃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왜 마다하십니까?” 끝없는 시련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홀연히 하늘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낼 초월자는 없다는 절망의 지식을 유전자처럼 간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계시(啓示)의 빛은 뜻밖의 곳으로부터 비쳐온다. “신은 사람들이 서로를 보살필 마음을 품을 정도만큼만 당신을 알 수 있도록 허락하셨나 보다. 우리가 하늘에 너무 매혹돼 이 땅에 흥미를 잃지 않도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불꽃 같은 헌신의 삶으로 ‘붉은 처녀’라는 별명을 얻은 시몬 베유는 고난의 역경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따뜻이 보살펴주는 인간애(人間愛)’의 희망을 헤집어냈다. 독실하다는 신자들이 ‘심판’밖에 읽어내지 못하는 저 끔찍한 불행으로부터.

 지진·쓰나미·방사능의 세 겹 재난으로 허우적거리는 이웃나라에 거침없이 ‘경고·심판’이라는 으스스한 해석을 들이민 도그마티스트(dogmatist)들은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도 답변할 수 있기 바란다. “자연재해에서 살아난 신자들은 신의 자비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감사한다. 그 자비로운 신이 요람에 누운 아기들을 재난 속에서 죽였다.”(샘 해리스,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참혹한 쓰나미의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간 우리 구조대원들의 갸륵한 발걸음이, 평생의 한(恨)을 잠시 접고 일본인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한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어진 마음이, 방사능 구덩이에서 음울하게 어른거리는 독도 야욕(野慾)에 분노하면서도 도움의 손길을 거두지 않는 휴머니즘의 향기가 저 섬뜩한 심판론, 우상숭배론의 설교보다 더 큰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무엇이 우상인가? 우상숭배를 금하는 십계명은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異敎徒)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삶으로는 물신(物神)을 따르는 혼합신앙이 곧 우상숭배다(마태 6). 성공과 풍요의 기복(祈福)으로 소란한 어떤 교회들이야말로 그 혼합신앙의 제단이 아닌가? 무엇이 유물론이고 물질주의인가? 나눔을 외면한 채 끼리끼리 호의호식하는 ‘부르주아 크리스천’들이야말로 유물론의 실존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쓰나미가 정녕 우상숭배에 대한 징벌이라면, 우리 또한 그 징벌에서 멀지 않음을 근심해야 할 것이다. 자연의 신비, 초자연적 섭리 앞에 겸허히 머리 숙여 우리들 자신의 삶부터 깊이 성찰할 일이다. 종교 권력을 둘러싼 법정싸움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웃의 불행을 굳이 ‘죄와 벌의 인과(因果)’로 해석하고 싶은 종교인들에게 예수는 이런 말씀을 남겼다.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이 (신성한 성전과 대제사장이 있는)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은 줄로 아느냐?”(누가 13)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