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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조원 벌어도 탈? 버냉키의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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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지난해 월가의 최고 금융그룹은 ‘버냉키주식회사(Bernanke & Co.)’였다.” 미 금융평론가 더글러스 프렌치가 최근 블로그에 내놓은 평가다. 버냉키회사란 벤 버냉키(58) 의장이 이끄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를 말한다.

 지난해 FRB는 순이익으로 816억3500만 달러(91조5000억원)를 거둬들였다. 그해 미국 5대 금융그룹의 순이익은 다 합해 봐야 387억7200만 달러 정도였다. FRB 순이익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FRB란 돈방석에 앉은 버냉키는 고액 연봉을 받았을까. 그의 지난해 연봉은 22만 달러(2억4000만원)에 불과했다. 금융위기에 잘 대처한 공을 인정받아 보너스를 챙긴 것도 아니다. FRB 예산권을 쥔 미 의회는 아주 인색하기로 유명하다. 말로 상찬할 뿐이다.

 버냉키는 선물과 옵션 등으로 신묘한 금융 테크닉을 구사하지 않았다. 그저 ‘돈 꿔주고 이자 받기’를 했을 뿐이다. 가장 원초적인 금융기법이다. “모기지담보부증권(MBS)과 미 재무부채권, 보험회사 AIG에 빌려준 돈에 붙은 이자가 지난해 순이익의 90.5%를 차지했다.” FRB 회계를 감사한 딜로이트의 보고서 내용이다.

 세 가지 자산은 금융위기 때 ‘독성 폐기물’이었다. 사려는 사람이 없어 값이 폭락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당시 FRB는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그 자산들을 끌어안았다. 안정화 조치였다.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플레이와는 거리가 먼 긴급조치였다. 이전까지 FRB는 국채 등 최고 우량 채권만을 사고팔았을 뿐이다.



 버냉키의 파격적인 구제작전 결과 FRB 자산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2007년(9100억 달러)의 2.6배인 2조3700억 달러로 불어났다. 금융 평론가 프렌치는 “버냉키가 미 FRB 역사상, 아니 근대 중앙은행 역사상 버냉키만큼 가장 많은 자산을 장악한 중앙은행가는 없었다”고 촌평했다. 전문가들은 영국의 영란은행(BOE)이 설립된 1694년을 근대 중앙은행의 시작으로 본다. 버냉키는 317년 역사상 가장 부유한 중앙은행의 리더인 셈이다.

 “FRB의 지난해 순이익엔 자본이득이 들어 있지 않다.” 그레고리 맨큐(경제학) 하버드대 교수가 영국 매체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FRB는 패닉 순간 MBS를 아주 싼값에 사들였다. “시장 가격에 맞춰 평가해 보진 않았지만 FRB는 적어도 20% 정도 자본이득을 봤을 것”이라고 맨큐 교수는 추정했다. 그 정도만 돼도 시세차익은 수천억 달러에 이른다.

 버냉키는 주체할 수 없는 자산이나 순이익, 시세차익이 달갑지만은 않다. 중앙은행의 최고 자산인 통화의 가치를 희생시킨 대가이기 때문이다. 달러 가치를 복원하기 위해 FRB는 자산 1조4000억 달러 정도를 처분해야 한다. 출구전략이다. 버냉키가 한꺼번에 그 물량을 털어내면 글로벌 시장은 일대 패닉에 빠질 수 있다. 외환시장에선 달러 가치가 급등한다. 세계 돈의 흐름이 마구 뒤엉킨다.

 또 올 6월 말까지는 자산규모를 줄이기가 쉽지 않다. 버냉키는 그때까지 6000억 달러를 동원해 미 재무부 채권을 사들이기로 약속했다. ‘2차 양적 완화’ 공약이다. 유럽 재정위기, 동일본 대지진 등 글로벌 경제상황도 만만치 않다. FRB가 글로벌 유동성의 상수원 구실을 계속해야 할 처지다.

 그런데 요즘 미 중앙은행 내부에선 출구전략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그 중심에 찰스 플로서 필라델피아연방준비은행 총재가 있다.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공개시장위원회(FOMC)의 올해 멤버이고 물가안정을 중시하는 매파다. 그는 지난주 말 통화긴축 방안(플로서 모델)을 제시했다.

 플로서 모델에 따르면 FRB는 출구전략 시작 이후 1년 동안 기준금리를 현재 0%에서 2.5%로 올린다. 기준금리를 0.25%포인트씩 올릴 때마다 MBS 등을 1250억 달러어치씩 처분한다. 10차례 걸쳐 1조2500억 달러어치를 파는 셈이다. 그의 방안은 출구전략 계획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달러 가치 안정!”만 외치던 매파가 대안을 내놓은 셈이다. 그들은 4월 한 달 동안 비둘기파(성장론자)와 정면논쟁을 벌일 예정이다. ‘달러의 신전(FRB)’에서 엇갈린 말이 흘러나올 때마다 시장의 출렁거림이 더욱 커질 수 있다. 투자자에게 4월도 녹록한 한 달은 아닐 듯하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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