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하루 지난 우유 내버리나요?

중앙일보

입력

관련사진

photo

이코노미스트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흔히 벌어지는 실랑이 한 토막. 냉장고에 보관한 우유의 유통기한이 하루 지났다. 아이가 마시려 하자 엄마가 말리며 버리려 한다. 아빠는 하루 이틀 지난 것은 괜찮다며 먹어도 된다고 한다. 엄마는 불안하다. 포장에 찍혀 있는 유통기한을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빠가 찜찜한 마음으로 조금 마셔본 뒤 말한다. “거봐, 괜찮잖아? 마셔도 된다니까.” 결국 그 우유는 아빠가 마시거나 버리고 엄마는 수퍼마켓에서 새 우유를 사온다.

냉장 보관하면 우유 50일·식빵 20일 변질 안 돼 … ‘유통기한≠식품수명’

시중에 유통되는 우유 제품의 유통기한은 8~10일 정도다. 소비자는 이 유통기한을 ‘식품의 수명’으로 본다. 유통기한이 지나면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통기한의 정확한 개념은 제조일로부터 소비자에게 판매가 허용된 기한이다. 이 기한이 지나면 변질된다는 뜻이 아니다.

2009년 말 한국소비자원 식품미생물팀의 조사를 보면 유통기한의 맹점이 잘 나타난다. 소비자원은 우유, 커피음료, 치즈 등 9종을 대상으로 유통기한이 지난 후 언제까지 먹어도 안전한지를 실험했다. 0~5℃ 냉장보관 상태에서 유통기한을 전후로 PH(수소이온)농도, 대장균 수, 일반세균 수 변화를 살펴본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우유는 최장 50일, 액상커피는 30일, 치즈는 70일까지 품질 변화나 안전상의 문제가 확인되지 않았다. 반면 25℃에서 보관한 제품은 대부분 유통기한 만료일부터 상하기 시작했다. 소비자원 미생물팀은 “유통기한은 제품의 변질을 가르는 시한이 아니며 어떻게 보관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실험 결과를 설명했다.
유사한 실험은 또 있다. 소비자원이 지난해 2월부터 다섯 달 동안 시중에 유통되는 빵을 조사한 결과다.

유통기한은 판매 허가 시기일 뿐
소비자원 미생물팀이 베이커리 식빵 3종과 일반 수퍼마켓이나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양산 식빵 4종을 조사한 결과 유통기한이 끝난 후 냉장온도(0~5℃)를 유지할 경우 20일이 지난 시점까지 먹어도 안전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가정 내 상온(25℃)에서 보관할 경우 베이커리 제품은 구입 후 8일, 양산 제품은 유통기한 만료 후 10일이 지나면서 곰팡이가 발생했다.

두 실험만 보면 국내 식품의 유통기한이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설정됐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또 다른 실험 결과도 유의해야 한다.

소비자원의 빵류 조사에서 크림빵이나 생크림케이크의 경우는 식빵과 결과가 확연히 달랐다. 5℃에서 보관했는데 유통기한 경과 2일 후부터 식중독을 유발하는 황색포도상구균이 검출됐다.

또한 한국식품연구원이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김밥과 샌드위치를 조사한 결과 10℃에서 일반김밥은 40시간, 삼각김밥은 48시간,샌드위치는 42시간이 지나면 변질이 시작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품연구원은 실험 결과를 종합해 10℃ 조건에서 일반김밥은 15~33시간, 삼각김밥은 32~33시간, 샌드위치류는 27~30시간이 적정 유통기한이라고 밝혔다.

관련사진

photo

기자가 서울 중구 순화동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모 식품회사 삼각김밥의 유통기한을 살펴본 결과 3월 22일 22시에 제조된 제품의 유통기한은 3월 24일 10시까지였다. 총 36시간이다. 아슬아슬한 유통기한인 셈이다. 중앙대 식품공학과의 박기환 교수는 “삼각김밥은 유통기한이 지나면 먹어서는 안 되는 식품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유통기한보다 보관 방법이 중요
두부나 어묵도 마찬가지다. 소비자원에 따르면 두부나 어묵은 유통기한 만료일까지 5~35℃에서 대장균은 검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25℃ 이상에서 보관한 두부는 유통기한이 만료되기 전에 일반 세균과 황색포도상구균이 검출됐다.

이들 실험이 말해주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유통기한 만료가 곧 상한 식품을 뜻하는 건 아니라는 것, 제품 변질은 원료나 유통방법·보관 온도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 식품 종류에 따라 유통기한이 갖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관련사진

문제는 이러한 정보를 소비자는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 국내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식품에는 ‘유통기한’만 찍혀 있기 때문이다. 3월 16일 한국소비자원이 주최한 ‘합리적 식품 소비를 위한 유통기한제도 개선 방안 마련 공청회’에서도 이 문제가 집중 논의됐다. 한국소비자원의 정윤희 시험검사국장은 “식품의 품목별 특성을 반영한 세분된 유통기한 표시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중앙대 식품공학과 박기환 교수는 “유통기한에 대한 개념과 소비자 인식을 바꾸기 위해 제조, 포장, 보관 방법에 따른 다양한 유통기한 설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유통기한 제도 개선은 단순히 식품의 유통기한을 늘리자는 게 아니다. 박기환 교수는 “유통기한의 개념을 바꾸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유통기한이 지나면 먹어서는 안 되는 것과 먹어도 문제가 없는 식품이 있는데, 이를 유통기한이라는 하나의 용어로 표기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선진국 중에서 우리나라처럼 유통기한 하나로 식품 기한을 표시하는 나라는 없다”며 “제도를 바꾸는 문제라 어렵겠지만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 측면이 크기 때문에 서둘러 손을 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한국식품공업협회 식품안전부의 송성완 부장은 “2000년 초에 소비자연맹이 유통기한 제도 문제를 제기하면서 정부와 업계, 시민단체가 개선하는 쪽으로 의견 일치를 봤지만 그사이 정부 담당자가 바뀌면서 흐지부지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식품 기한 표시는 경직돼 있다. 소비자보다는 공급자나 공무원이 편리한 제도다. 2007년에 품질유지기한 표시제도(지정된 보관방법을 따르면 식품 고유의 품질이 유지될 수 있는 기간)가 도입됐지만 통조림이나 잼류, 커피류 등에 한정됐다. 대부분 식품업체는 유통기한만을 표시한다. 반면 선진국은 판매기한, 소비기한, 상미기한, 최상품질기한, 사용기한, 최소보존일, 식품 포장일 등 다양한 제도를 혼용한다(박스기사 참조).

관련사진

photo

유통기한 제도를 개선하면 버려지는 음식물을 줄일 수 있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가 2009년 소비자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식품에 표시된 것 중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유통기한’(25.4%)이다. 그 다음이 가격(15.8%), 원료 및 성분(14.6%), 원산지(14.5%) 순이다.

유통기한 제도가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식품 안전에 민감한 소비자나 정부 입장에서 보면 식품 안전 사고를 예방하는 데 가급적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편이 낫다. 과학적으로 식품 품질에 이상이 없는 기한이 10일이라면 유통기한을 5~7일로 하는 게 훨씬 안심된다는 얘기다. 두 기간의 비율은 ‘안전계수’라고 불린다. 실제로 국내 식품업체는 유통기한의 안전계수를 0.5~0.7로 잡는다.

하지만 유통기한 제도가 먹어도 되는 식품을 음식 쓰레기로 전락시키는 주된 이유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유통기한이 지나 팔지 못하고 폐기되거나 반품되는 제품은 전체 식품 매출액의 2% 수준이다. 한국식품공업협회에 따르면 유통기한이 임박하거나 초과해 반품되는 비율은 과자류가 1.1%, 빵 3%, 음료 3%, 장류 2% 등이다. 이를 비용으로 따지면(2009년 기준) 과자류는 연간 270억원, 빵은 630억원, 장류 180억원 정도다. 식품공업협회 송성완 부장은 “유통기한 관련 반품 또는 폐기되는 손실 비용은 연간 6500억원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실제로 메이저 식품회사인 C사는 2009년 반품 또는 폐기 제품 관련 손실이 210억원, L사는 150억원이었다. 중견 식품회사인 D사는 45억원, 우유업체인 N 사는 30억원의 손실을 봤다. 이는 식품업체 얘기일 뿐 가정에서 버려지는 것은 추정하기도 어렵다. 가정마다 대형 할인점에서 잔뜩 식품을 산 후에 먹지 않고 버리는 음식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도만 바꿔도 2조원 절감
유통기한은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전형적인 문제다. 전문가들은 유통기한 표시만 탄력적으로 바꿔도 자원 낭비를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박기환 교수는 “품질유지기한으로 표시할 수 있는 식품은 전체 유통식품의 16%”라며 “이 제도를 도입해 먹어도 되는데 폐기되거나 반품되는 제품을 5%만 줄여도 연간 약 2조2000억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유통기한 제도를 바꾸는 것이 식품 업체의 이익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유통기한 제도가 바뀌어 사실상 식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이 늘면 기업이 이익을 본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 제도에 식품업계가 모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유통기한이 짧은 식품을 취급하는 곳은 회의적이고, 긴 곳은 찬성하는 편이라는 게 식품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국소비자원 심성보 연구원은 “유통기한이 지나도 품질에 문제가 없다는 실험 결과를 업체에 설명하면 대부분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일부 업체는 유통기한이 길어지면 제품 회전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반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인식인데 사실상 판매기한이 늘어나는 제도를 도입했다가 소비자 클레임(불만)이 느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다”고 전했다. 한국식품공업협회 송성완 부장은 “식품 표시를 다양화했을 경우 만약 안전문제가 발생하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우려를 한다”고 말했다. 박기환 교수는 “유통기한은 식품업체 책임 아래 자율로 정하기 때문에 제도가 바뀐다고 관리 감독이 힘들다는 것은 기우”라고 강조했다.

식품제조업체나 개인으로부터 식품을 기탁받아 소외계층에 지원하는 푸드뱅크 사업이 요즘 어렵다고 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13년간 3700억원에 달하는 기부 식품이 소외계층 25만 명에게 전달됐다. 약 400여 개 식품업체가 이 사업에 동참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임박한 제품을 처리한다고 오해한다. 유통기한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바꾸고 제도를 개선하면 더 많은 소외계층이 질 좋은 푸드뱅크의 수혜를 받을 수 있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 외국은 어떻게

소비기한·상미기한 등 다양하게 운영

우리나라에서 ‘유통기한’은 ‘팔 수 있는 기간(Sell by Date)’이다. 유통기한은 곧 소비 만료일이다. 하지만 외국에서 소비 만료일은 우리나라 유통기한과 전혀 다른 개념이다.

CODEX(국제식품규격위원회)는 포장식품에 대해 우리나라의 유통기한과 같은 ‘판매기한’은 물론 최소보존일, 사용기한, 권장최종소비일, 소비만료일 등을 인정한다. 일본은 보존기간의 정도에 따라 ‘소비기한’과 ‘상미기한’으로 분류한다. 미국은 이유식이나 신선식품은 ‘사용기한’, 고기류는 ‘포장일’로 표시한다. 또한 우리나라 유통기한과 비슷한 ‘판매기한’은 물론 식품이 포장된 ‘포장일자’, 최상의 품질이 유지되는 ‘최상품질기한’ 등으로 표시한다.

EU(유럽연합)는 단기간에 부패하기 쉬운 식품은 ‘사용기한’, 일반식품은 ‘최소보존일’로 표시한다. 호주는 ‘포장일’ ‘사용기한’ ‘최소보존일’을 쓰면서 7일 미만 또는 7~90일 섭취 가능 등의 구체적인 날짜를 표기한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