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권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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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굳이 비교하자면 초과이익공유제 비슷한 것이 권분(勸分)이다. 흉년 때 부호들에게 사재를 덜어 빈민을 구제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독조(督糶)도 같은 뜻인데, 조(糶)는 쌀을 판다는 뜻이니 역시 곡식을 내놓게 독려하는 것이다.

 권분은 때로 강제성을 띠었다. 성종 16년(1485) 큰 흉년이 들자 조정에서는 ‘주현관(州縣官)에게 명해 곡식을 감춘 자를 찾아내 그 식구가 먹을 것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빈민의 목숨을 잇게 했다(『성종실록』 16년 7월 8일)’고 전하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강제성을 띠자 수령들은 권분을 부유한 백성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기도 했다. 영조 8년(1732) 2월 시강관(侍講官) 이종성(李宗城)이 ‘올해는 부호의 권분이 거꾸로 폐단이 되고 있다’고 보고하자 영조가 ‘수령이 부유한 백성을 가두고 곡물을 강제로 빼앗은 자가 있었다’고 시인한 것이 이런 사례다.

 자진해서 권분하게 하려면 반대급부가 필요했는데, 가장 좋은 것이 벼슬이었다. 정조는 “우리 조정에서도 권분한 선비들을 일명(一命)에 제수하는 법전을 둔 적이 있다(『홍재전서』·‘고식(故寔)’)”고 말했다. 일명이란 처음 벼슬길에 나갈 때 받는 종9품직을 뜻한다. 그런데 벼슬을 주겠다고 하고서는 권분하고 나면 모른 척하는 경우도 있었고, 민간에만 권분을 강요하고 정부는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숙종 21년(1695) 10월 부호군(副護軍) 조형기(趙亨期)는 응지상소에서 ‘내부(內府·내수사) 여러 창고 저축 중 올해에는 절반을 덜어 유사(有司·진휼기관)로 돌리고, 여러 공물(貢物)도 절반을 감해 진휼하는 자원으로 충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실 소유 내수사 물건의 절반과 왕실이 받는 공물의 절반도 진휼 자금으로 돌리라는 뜻이다. 정작 민간에는 권분을 권해 놓고 숙종 자신은 사재를 내놓는 데 인색했음을 알 수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초과이익공유제도 취지야 좋지만 정부는 어떻게 고통을 분담할 것인가가 빠진 채 논의가 진행되는 것이 문제다. 고유가 문제도 정부가 먼저 유류세를 내리면서 인하를 요구하면 정유사가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고물가 전세대란 등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서민들은 정부는 무엇하느냐고 아우성이지만 정작 정부는 보이지 않는다. 정조는 재위 2년(1778) 10월 “나는 비용 절감은 궁위(宮闈·대궐)에서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여긴다”고 말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