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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 세상읽기]1999년의 눈물 네줄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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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해 말 '1998년의 눈물 네줄기'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1998년은 정권교체의 첫 해이자 IMF 1차 연도여서 한국사회는 어느 해보다도 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었다. 순리의 반작용이랄까, 그런 가운데서도 '인간'을 확인할 수 있거나 성취의 감동을 전해주는 사건도 있었다. 필자는 그런 드라마를 상징하는 4인의 눈물을 골라 보았던 것이다.

취임식에서 눈물을 보였던 김대중 대통령, 현역은 다 빠진 상황에서 감옥에 가면서 눈물을 훔쳤던 원외(院外)
정대철씨, 사상보다 한 여인의 헌신을 얘기할 때 울먹였던 박노해 시인 그리고 고단한 몸을 고국의 병실에 뉘이며 골프공같은 눈물방울을 굴렸던 박세리…이들이 눈물의 주인공이었다.

글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1998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교훈과 용기를 얻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면 내년 이때쯤 필자는 네 줄기 눈물대신 네 가지 웃음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글의 잉크냄새가 아직도 풍기는 것같은데 다시 연말이 왔다. 1999년은 1998년과는 참으로 달랐다. 어떻게나 빨리 경기가 회복됐는지 많은 이들이 이미 IMF라는 단어를 잊은 것같다. 물론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와 실업자가 위기의 후유증에 고통받고 있지만 어쨌든 중산층의 회복은 분명한 것이었다. 경제의 복구 덕분에 외양은 그렇게 달라졌지만 유감스럽게도 사회의 비극적 구조는 하나도 바뀌질 않았다. 오히려 갈등의 지층구조가 여러 사건으로 더욱 융기(隆起)
했다. 그래서 올해도 네가지 웃음보다는 눈물 네줄기를 써야만 할 것같다.

지난해 눈물의 스타는 누가 뭐래도 김태정씨일 것이다. 그는 2월1일 일찌감치 1999년 눈물시리즈의 서두를 장식했다. 대전법조비리에 대한 수사발표 직전 김태정 검찰총장은 대국민 사과문을 읽어내려가다가 검사들의 사표를 받아야 했던 대목에 이르러 울먹였다.

"그 가족들에게 평생동안 남을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겨우 말을 마친 金총장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그 손수건은 그러나 검찰비극의 마감재가 아니라 서곡(序曲)
적 징표였다. 김씨 개인에게도 재앙(災殃)
코스요리를 위한 냅킨이었다.

11월24일 김씨는 대중 앞에 다시 눈물을 보여야 했다. 이번에는 부인까지 합류했다. 김씨는 "어제 우리 부부는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다"고 했다. 김씨가 밍크사건 대국민 사과문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부인은 손수건을 꺼내들고 흐느꼈다.

'검사 김태정'은 활달한 성격, 두터운 친화력, 일에 대한 정열 등으로 좋은 평판을 받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능력으로 엘리트의 길을 달렸고 속속 고지에 올랐다. 그의 검사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일은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 비자금 의혹에 대한 수사를 유보한 것. 당시 집권당이 세풍(稅風)
이라는 거대한 스캔들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훗날 드러난 것을 보면 수사를 유보한 검찰의 결정은 역사적으로 옳은 일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한국 정치권력의 속성으로 볼 때 검찰총장은 연이어 두 대통령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한국적 현실에서 역대 정권은 검찰이라는 조직을 통해 정치성이 농후한 사정을 진행해 왔다. 그래서 검찰총수는 사정이나 권력관리와 관련된 정권의 비밀을 누구보다 많이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YS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때문에 YS 권력관리의 비밀을 상당히 아는 검찰총수가 후임정권의 핵심부에서 그 자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도의상 옳은 일이 아니었다. 법률과 총장임기제라는 제도가 허용해도 그것은 순리와 부닥치는 일이었다. 만약 새 정권이 들어섰을 때 김씨가 검찰총장에서 물러나 있었다면 수사유보 결정의 합리성이나 능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그는 다른 자리에 중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눈물에 염분 말고 혈소판같은 것도 들어있다면 가장 많은 혈소판은 전 필드하키 국가대표선수 김순덕씨의 눈물속에 있었을 것이다.

"도현이를 끝내 가슴 속에 묻어둔 채 이 땅을 떠납니다…." 김씨는 씨랜드 화재에서 죽은 큰아들을 모국의 산야에 뿌린 후 11월18일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 병아리같은 아이들이 콘테이너 속에서 엄마 아빠를 부르며 머리카락을 뜯으며 죽어간 나라, 정쟁에만 세월을 보내고 그런 비극을 막으려는 노력에는 한없이 게으른 나라, 호프집의 닫힌 철문 안에서 다시 청소년들이 질식해 죽어간 나라…그런 나라에서 둘째 애를 키울 수는 없다며 그들은 떠나간 것이다. 김태정씨의 눈물이 한국사회 상부 소프트웨어의 왜곡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김순덕씨의 피눈물은 하부 소프트웨어의 뿌리깊은 부실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1999년 한국인의 눈물 중에서 가장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익치 현대증권회장의 눈물일 것이다. IMF탈출이 한국경제에 대한 나라안팎의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분위기가 가장 먼저 반영된 곳이 주식시장일 것이다. 그리고 주식시장의 활황이 역으로 경제회복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면 이회장의 공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구속되기 전만 해도 "연말 주가가 2000은 쉽게 돌파할 것"이라고 호언했었고 그의 바람몰이는 한국경제에 대한 심리적 자극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봉우리를 채 넘기 전에 추락했었다. 주가조작사건으로 검찰에 소환된 이회장은 9월10일 영장실질심사 법정에 앉았다. 판사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바이코리아 가입자 중에는 (연수입)
3천만원 미만이 70%나 된다. 실직가정에 희망을 주고 싶었는데…" 라고 말하다 끝내 흐느끼며 손수건을 꺼냈다. 그는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회장직에 돌아와 다시 투자자들에게 '한국경제에 대한 확신'을 권유하고 있다.

주식으로보면 1999년은 열풍의 해였다. 진짜 확신이 있는지 여부는 몰라도 사람들은 코스닥에 마구 몰려들고 있다. 그들은 고지를 향해 뛰어올라가고 있다. 그러나 주식에는 항상 낭떠러지가 도사리고 있다. 개인적 인생에서 올해 고지와 낭떠러지를 경험한 사람이 바로 이회장이다. 그래서 그의 눈물은 어쩌면 주식인생과 비슷한 것인지 모른다.

1999년이라고 해서 혼탁한 눈물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98년의 박세리처럼 한국인의 가슴에 시원한 소나기처럼 다가온 눈물도 있었다. 씩씩한 한국의 신세대 박찬호. 그가 지난 10월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조치원 신병교육대에서 4주을 보냈다. 그가 교육을 마치고 나오는 날 카메라는 정문을 찍고 있었다.

박찬호는 교육대 장교와 하사관에게 경례를 하고 그들과 짙은 포옹을 나눴다. 그리곤 부모에게 경례를 붙였다. 그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군대를 다녀온 많은 이들이 경험하듯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울음이다. 고생에 대한 미운 정 고운 정, 뭔가 해냈다는 기쁨, 땀을 나누었던 이들과의 이별, 가족과의 재회, 세상의 다른 면이 보이기 시작하는 작은 희열…이런 것들이 합쳐져 폭포같은 청년의 눈물로 흘러버린 것이다.

그는 한국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4주 동안 내 정신력은 두 배 이상 강해졌다. 이 경험은 내년 시즌 나를 지켜줄 큰 힘이 될 것이다. 군인정신으로 20승 고지에 오르겠다."

4인의 눈물과 함께 20세기의 마지막 태양들이 지고 있다. 경제회복이 남의 일 같다는 노동자·실업자들의 분노, 4월의 총선격동…. 2000년에는 어떤 눈물들이 흐를 것인가.

김진 편집위원<jinjin@joongang.co.kr>
주간 이코노미스트(economist.joongang.co.kr)
제 516호 199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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