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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미학,문화다원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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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비상한 상상력이 연출한 설치미술이었다. 어떤 예술가도 그토록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지난해 7월 내한한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당시 프랑스문화원 강연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한달 전 소몰이 방북에 대해 탄성을 질렀다. 소 500마리를 실은 트럭 50대가 기다랗게 꼬리를 문채 통일대교를 건너 군사분계선으로 넘어가는 모습은 장대한 예술적 드라마였다는 것이다.

정치ㆍ경제적 의미에서만 바라보던 우리와 달리 기 소르망은 정 회장 방북을 기발한 착상의 미술행위로 관찰하고 있어 신선함을 안겼다.

예술이 창조성으로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라면 그의 소몰이 역시 뛰어난 예술행위임이 분명하다. 이는 '기업가와 예술가를 다 같이 자극하는 것은 새로움을 찾아내려는 끊임없는 충동이다'는 다니엘 벨의 말과 관련지어볼 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처럼 최근의 시대 흐름은 영역간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상호 해체ㆍ통합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새 분야도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경제와 문화가 과학 등과 접점을 이루고, 가상과 현실의 울타리가 크게 낮아지며 주류와 하위문화의 만남도 일상화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장르, 계층, 국가 사이에 놓인 장벽 또한 갈수록 무의미해지는 상황이다.

한 마디로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공존하고 존중받는 추세로 시대가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광의적ㆍ협의적 의미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광의적 의미의 문화측면에서 볼 때 영역간 해체ㆍ통합현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른바 문화적 다원주의로 정의되는 이런 현상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면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광선(철학) 이화여대 교수는 '새 천년에는 정치, 사회, 경제, 예술 등 전 분야에서 해체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며 이성보다 감성, 획일성보다 자유분방함, 조작과 통제에 의한 독재보다 다양성과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대부분의 전문학자와 문화비평가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문화의 다원화를 피할 수 없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물결로 받아들인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상징하듯이 지식과 예술, 교육 등 문화의 산업ㆍ상품화가 가속화해 여러 국가가 만든 자동차가 한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처럼 뒤섞이고 있다.

문제는 문화의 민족적,국가적,영토적 구속력이 약화되는 격류 속에서 어떻게 세계문화와 호흡하면서 우리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느냐는 것이다.

근래 생긴 정책기획위원회와 새천년준비위원회도 이같은 추세에 적극 부응한다는 취지에서 다양한 대처방안을 내놓고 있다. 주류와 비주류, 정통과 비정통 문화가 한데 어울리는 다양성의 흐름이 21세기에 더욱 강해진다는 전제에서 영역간 해체ㆍ통합과 다원화에 따른 긴장과 갈등 해소방법이 뭔가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기구는 새 천년에는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용정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상이한 문화를 받아들이는 자세야말로 시대에 부합하는 올바른 문화적 태도라고 강조한다.

올바른 가치기준과 개방적 태도에 기초해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자기반성과 혁신을 끊임없이 이뤄야 한다면서 이 문화적 다원주의가 지식정보화시대에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처럼 시대의 성격을 바뀌게 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컴퓨터,초고속통신망 등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미디어 등장을 꼽는 게 일반적이다. 이는 문화예술과 과학이 접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문학과 이공학이라는 기존의 이분법적 틀을 간단히 깨뜨리고 있다.

이 새로운 미디어는 가상과 현실의 벽을 허무는 데 과거의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체제로 현실을 바꿈은 물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많은 정보를 쌍방향에서 교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실상의 참여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협의적 의미의 문화에서도 다원화 현상은 이미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문학, 공연, 미술 등 장르간의 교류는 물론 주류와 하위문화간의 구분도 무의미해지는 추세인 것이다.

시인 황지우씨가 조각전과 사진전을 차례로 여는 것이나 가수 김원중씨가 연극무대 주연으로 나서는 것은 이런 현상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장르와 장르, 학문과 학문 사이를 엄격히 구분하며 순수성을 강조했던 근대문화의 계급적ㆍ귀족적 이분법은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도착오로 전락하고 있는 것. 이에 대해 뉴욕타임지는 최근 보도에서 '21세기에는 `문화 잡종교배(Hybrid)'로 새로운 문화가 탄생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이런 탈장르 바람을 세계정신사의 흐름 속에서 포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곤 서울대 교수도 다음 세기에는 탈중심의 정신 속에 `절대가 무너진 시대'로 흘러갈 것이라고 내다본다. 미술, 음악, 무용, 연극, 문학 등 모든 예술장르가 인터넷 등 쌍방향 테크놀러지에 결합하며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실험과 모색이 다양하게 그리고 역동적으로 전개되리라는 것이다.

문화관광부가 내년을 `새로운 예술의 해'로 선정한 것도 이같은 탈장르 추세를 상징적으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문화부는 그동안 특정예술장르를 매년 하나씩 선정해왔는데, 장르를 불문하고 예술의 새 영역과 방향을 모색하도록 지원한다는 뜻에서 이렇게 결정했다.

`새로운 예술'은 기존 예술장르 내에서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표현행위를 의미하는 동시에 장르간 통합과 분화에 의해 생겨나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까지를 포괄하는개념이다. 문화부는 과거에 예술로 인정되지 않았던 분야들이 속속 예술세계로 편입되면서 그 지평도 한결 넓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단적인 예가 백남준씨의 비디오 아트로, 50년대에 주변부 예술로 출발했던 비디오 아트는 최근 베니스 베엔날레에서 대상을 받는 등 주류반열에 당당히 올라섰다.

코앞에 다가온 21세기는 지금까지의 가치와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고 그 속도도 매우 빠르게 진행될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과거의 틀에 안주하는 것은 단순한 답보에 그치지 않고 냉엄한 역사 현실에서 살아 남기조차 어려운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런 시대 조류에서 시각의 대전환과 창조성의 발휘야말로 자기 생존과 사회발전의 첩경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나는 한국적이라는 말 자체가 싫다. 한국적 정체성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편협한 민족주의에 갇히지 않는 코스모폴리탄적 감수성이 중요하다'는 올해 베니스 베엔나레 특별상 수상작가 이불씨의 말은 다소 과격한듯 하지만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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