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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시계 대표는 롤렉스? 시계 위에 시계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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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호 28면

파텍 필립 5170J 크로노그래프 모델. 39 옐로골드 케이스에 자체 제작한 무브먼트를 탑재했다.

시계가 ‘남자의 로망’이라는 건 옛날 얘기다. 이젠 하나쯤은 제대로 갖춰야 하는 ‘남자의 자격’이다. 시계에 대한 관심도 부쩍 커졌고 롤렉스나 오메가 같은 대형 브랜드를 지나 다양한 고급 시계에 대한 수요도 늘었다. 하지만 시계는 여전히 어렵다. 용어가 복잡하고 브랜드 이름은 발음도 어려운 것이 태반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명품 시계의 기준은 여전히 롤렉스다. 하지만 세상엔 아주 많은 시계 브랜드가 있고, 이들 중 다수는 롤렉스 이상의 품질을 갖고 있다. 롤렉스는 실패 가능성은 없지만 가장 평범한 선택이란 얘기다. 결국 시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잠재 고객이 원하는 건 하나다. 다양한 시계 브랜드를 가치에 따라, 가격에 따라 분류하고 그중에서 내게 맞는 시계를 고르는 것이다.

‘손목 위의 로망’ 최고의 시계는 무엇인가

미국 부자가 선택한 시계는 블랑팡
미국의 명품 브랜드 조사전문기관인 럭셔리 인스티튜트는 해마다 보석·신발·의류·핸드백·자동차 등 여러 품목에 대해 브랜드 순위를 조사해 발표한다. 럭셔리 브랜드 순위지수(LBSI : Luxury Brand Status Index)다. 평균 유동자산이 1660만 달러(약 180억원)인 미국의 부자 소비자 505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한다. 시계는 매년 조사 대상에 포함되는데 지난해 1위는 블랑팡이 차지했다. 그 뒤로 바쉐론 콘스탄틴, 브레게, 쇼파드, 위블로, IWC, 롤렉스, 반클리프 아펠, 해리 윈스턴, 프랭크 뮐러가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갔다. 2009년 조사에선 IWC가 1위였고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이 뒤를 이었다. 미국의 부자들은 이 외에도 오데마 피게, 보메&메르시에, 부쉐론, 브라이틀링, 불가리, 까르띠에, 던힐, 디올, 에벨, 지라드-페라고, 에르메스, 론진, 루이뷔통, 몽블랑, 모바도, 오메가, 피아제, 라도, 태그호이어, 티파니 등을 가치 있는 시계로 꼽았다. LBSI가 정의한 ‘가치 있는 시계’는 ‘품질이 뛰어나고 고급스럽고 독창적이어서 흉내 낼 수 없으며, 시계를 착용한 사람을 특별한 사람으로 돋보이게 만드는 브랜드’였다.

LBSI는 거의 유일하게 브랜드의 가치를 계량화한 지수다. 언급된 브랜드들은 시계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견은 있다. 지난해 조사의 경우, 시계의 최고봉인 파텍 필립이 10위권에도 들지 못한 점, 신생 브랜드인 위블로가 5위권에 들어간 점 등을 놓고 시계 매니어들은 논란을 벌였다.

시계 시장은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하다. 파텍 필립처럼 보통 사람은 구경도 못해 본 최고급이 있는가 하면 타이맥스처럼 대중적인 것도 있다. 고급 시계군(群) 안에서도 롤렉스처럼 대량 생산하는 브랜드와, 파르미지아니처럼 최고급 시계를 소량 제작하는 개인 제작자가 동시에 있다. 평가의 기준이라는 것도 애매하다. 고가 시계 브랜드들의 기술력은 거의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미적 측면은 취향의 영역이라 평가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시계 브랜드들의 차이와 위상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다만 ‘차원’의 구분은 가능하다. 벤츠나 BMW가 좋은 자동차인 것과 별개로, 람보르기니·포르셰·페라리 등을 ‘수퍼카’라며 다른 차원에 두는 것처럼 말이다.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는 시계 업계 관계자 사이에서도 거의 이견이 없는 세계 3대 브랜드다. 그중 파텍 필립은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데 경매에서 이를 증명한다. 지난해 5월 제네바 크리스티 경매 시장에 나온 1944년 출시 모델 ‘크로노그래프 1527’은 520만 달러(약 66억원)의 사상 최고 낙찰가를 기록했다. ‘경매를 위한 시계’라고 불릴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값어치가 커진다는 데에서 파텍 필립의 가치가 나온다.

1953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대관식 때 스위스의 공식 선물로 증정된 256년 역사의 바쉐론 콘스탄틴,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대표 모델인 로열오크로 하이엔드 스포츠 시계 시장을 연 오데마 피게도 논란의 여지 없는 최고의 시계들이다. 그리고 브레게, 랑게 운트 죄네, 블랑팡이 그 뒤를 잇는다. 중력에 의한 시간 오차를 줄여주는 투르비옹을 처음 개발한 브레게나, 독일에서 ‘마이바흐’ 다음으로 명품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는 랑게 운트 죄네, 1735년 설립된 이래 단 한 번도 쿼츠 시계를 제작하지 않고 기계식을 고집한 블랑팡도 최고로 치는 데 무리는 없다.
피아제, 율리스 나르덴, 글라슈테 오리지널, 예거르쿨트르, 지라드-페라고, 프랭크 뮬러 등을 대체로 다음 ‘차원’에 놓는다. 그리고 이제 시계 매니어들은 롤렉스를 등장시키는 데 까르띠에와 IWC도 같은 ‘차원’으로 분류된다. 그 다음에야 오메가, 브라이틀링, 태그호이어, 보메&메르시에, 몽블랑이 등장한다.

진짜 명품은 연 2만여 개만 수작업 생산
그렇다면 왜 명품 시계의 대명사인 롤렉스는 한참 뒤에야 나올까. 롤렉스가 좋은 품질을 가진 시계인 건 틀림없다. 1910년 세계 최초로 손목시계의 크로노미터 인증을 획득했고, 1926년 방수·방진 기능을 갖춘 오이스터에 대한 특허를 출원해 시계사(史)에 족적을 남겼다. 브랜드 인지도도 높다. 이 때문에 롤렉스는 갈수록 가치를 더하는 투자가치 높은 시계로 수위에 거론된다. 다만 희소성을 지향하는 ‘하이엔드 럭셔리’ 시계들과는 시장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데서 차이가 생긴다.

파텍 필립이나 오데마 피게 등이 한 해에 생산하는 시계는 약 2만 개 안팎. 부품 하나하나를 수작업 하는 수공 생산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시계 하나를 만드는 데 5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춘 롤렉스는 연간 약 70만 개의 시계를 만든다. 물론 이 중엔 수공 작업하는 리미티드 에디션 모델도 있지만 브랜드의 희소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기는 ‘양날의 칼’ 같아서 ‘짝퉁’도 많이 만들어지는데 매년 생산되는 가짜 롤렉스는 생산량의 10배가 넘는 걸로 알려져 있다. 품질, 인지도,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 등 3박자를 갖춘 롤렉스가 뛰어난 브랜드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브랜드는 아닌 이유다.

지난해 4월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엔 럭셔리 시계 특집이 실렸다. 기사는 세월이 가치를 더하는 시계야말로 최고의 시계라면서 ‘럭셔리 시계 투자를 위한 팁’을 소개했다. 대부분은 ‘파텍 필립 등 최고급 브랜드나 리미티드 에디션을 소장하라’ ‘희소성이 큰 모델을 선택하라’는 등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별 도움이 안 될 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팁은 새겨둘 만한 데 ‘20년 이상 밤낮으로 차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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