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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온 브레송 영화의 감동

중앙일보

입력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 소설이고 모차르트가 독일음악이라면 로베르 브레송은 프랑스 영화다"(장 뤽 고다르)
"만일 영화감독들에게 노벨상이 주어진다면, 로베르 브레송은 이미 오래 전에 그 상을 받았을 것이다"(<빌리지 보이스>의 짐 호버먼)

올해 92세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영화작가로 추앙받는 프랑스 감독 로베르 브레송의 대표작들을 화질이 선명한 35㎜ 필름으로, 그것도 한글자막과 함께 감상한다는 일은 매우 가슴벅찬 일이다. 그동안 여러차례 언급하긴 했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슴답답한 일은 세계영화사에 등장하는 주요감독의 걸작들을 극장에서 볼 기회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극장들에서는 대부분 최신 영화들, 그 중에서도 특히 흥행 위주의 영화들을 상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계간 '필름 컬처'가 지난해부터 매년 주최하는 필름컬처 영화제는 우리 영화문화에 다양함과 깊이를 제공하고자 어려운 여건을 뚫고 기획된 행사이다. 지난 17일 개막 때부터 줄곧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정동아트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책 속에서만 만나거나 기껏해야 어렵게 구한 비디오로나 볼 수 있었던 작품들을 서울에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해준 주최측에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누벨바그에 깊은 영향을 준 로베르 브레송의 대표작 8편을 한 자리에 모은 회고전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건'에 가까운 일이다. 캐나다의 시네마 온타리오에서 주관하는 '로베르 브레송 회고전'은 지난 2월부터 세계 주요도시를 순회중이었고, 그 바쁜 일정 속에서 12월 중순에야 겨우 서울로 필름들을 들여올 수 있었다고 한다. 60년대 일본 뉴웨이브영화들과 90년대 세계 걸작영화들을 함께 상영하는 제2회 필름컬처 영화제의 개최일정은 바로 이 귀한 로베르 브레송의 필름들이 서울에 들어올 수 있는 기간에 맞추어 짜여진 것이었다. 아무튼 이번 브레송 회고전은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영화계 최고의 밀레니엄 행사로 손색이 없다.

첫 사흘동안 브레송 영화로는 〈호수의 란슬롯〉〈소매치기〉〈잔다르크의 재판〉을 보았고, 오늘부터 23일까지는 계속해서 〈당나귀 발타자르〉〈무셰트〉〈돈〉〈저항〉을 볼 계획이다. 일요일인 어제 본 〈잔 다르크의 재판〉이 남긴 긴 여운과 전율이 지금도 남아있고, 나머지 작품에 대한 기대가 쓸쓸하고 추운 겨울 내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있다.

83년 〈돈〉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로베르 브레송은 40년간의 작품활동기간 동안 단 13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우리에게는 특히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홍상수 감독이 자신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준 감독으로 꼽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화가 출신인 그는 영화에서 아주 필수적인 요소들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생략하는 미니멀리즘적인 스타일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창조했다. 그는 배우들의 연기나 감정표현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전통적인 영화의 '연극적'인 요소들을 거부했으며, 오히려 평면의 디테일과 사운드로만 정보를 전달했다. 그래서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평면적이고 무표정하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깊이있는 비평은 이번 회고전에 맞추어 발간된 <로베르 브레송의 세계>(한상준,홍성남 엮음, 한나래간)에 상세하게 서술되어 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아서왕의 전설을 재해석한 <호수의 란슬롯>은 정말 '당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느닷없는 폭력의 장면과 시대와 맞지 않는 의상 등이 주는 현대적인 느낌, 그리고 대결을 벌이는 기사들의 얼굴이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 신체부분의 클로즈업과 음악만으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마상경주장면이 압권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근거한 <소매치기>는 주인공이 프로 소매치기로부터 기술을 배우는 장면(손놀림의 클로즈업), 직접 설명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단지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다양한 해석과 느낌을 가지도록 전개해가는 브레송의 스타일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또한 잔 다르크의 실제 재판기록에 전적으로 의거해 만들어진 <잔 다르크의 재판>은 엄격하게 절제된 화면으로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는데 마지막 화형대에 오른 잔 다르크의 처형장면은 리처드 라우드가 "영화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잔이 진짜로 불타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는 말을 실감나게 했다. 장작이 타는 소리만이 요란하게 들리면서 두 사람의 신부가 잔 다르크를 위해 십자가를 높이 든 채 눈물흘리는 장면은 가슴에 깊은 감동과 전율을 전달해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 장면과 함께 <호수의 란슬롯>에서 피가 '냇물처럼' 흐르는 소리의 클로즈업은 사운드트랙으로 이야기의 디테일을 제공한다는 브레송영화의 특징을 잘 드러내준다.

<당나귀 발타자르>는 당나귀를 주인공으로 한 독특하고 탁월한 작품이며 <저항>은 지난 58년 서울에서 개봉돼 브레송의 영화 중 유일하게 한국개봉됐다는 기록을 안고 있는 작품이다. 세상에서 사랑과 따스함을 찾는데 실패한 소녀의 자살을 그린 <무셰트>와 돈 때문에 잇따른 살인이 일어나는 <돈>은 1980년대 최고의 영화로 꼽히는 걸작이다. 하나하나 정말 놓치기 아까운 작품들이다.

추신: 추운 날씨에도 많은 영화매니어들이 브레송의 영화를 보기 위해 정동아트홀을 찾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영화학과가 50여개가 넘는다는 점, 그리고 감독 등 영화지망생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서울의 브레송 회고전은 여러차례 매진을 기록했다는 외국의 회고전에 비해서는 조용한 편이다. 정말 우리나라에서 일고 있는 영화붐은 진지한 접근과 배우려는 자세가 결여된 '거품'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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