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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일본이여, 외로워하지 마세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일본이여, 외로워하지 마세요   - 문정희(시인)

오늘, 사람의 눈을 뜨고

깊은 울음에 잠긴 당신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성난 대지가 요동을 치고, 검은 바닷물이 절망으로 넘실거릴 때

대자연 앞에 가뭇없이 무너지는 인간의 삶

지구의 눈동자들은 아까운 생명들이 막무가내로 쓸려나가는 것을

그만 넋을 잃고 목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곧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당신의 절제와 의연함을 보고

자세를 고치고 다시 일어나 앉았습니다

고통을 삼키고 삼키며 극도로 비탄을 삼가는 당신으로 하여금

새삼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홀연히 깨우쳤습니다

울음을 작게 만들고, 슬픔도 작게 만들어

결국은 나를 아주 작게 만들어 더없이 절도 있고 겸허한

인간끼리의 사랑을 보여주는 기적을

당신은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비극 대신 그 자리에는 뜻밖에도

감동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참혹한 쓰나미나 방사선이나 그 어떤 것도

인간의 희망을 송두리째 휩쓸어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의 눈으로 보게 했습니다

지난 세계대전 끝 무렵 원자탄이 휩쓸고 간 일본의 폐허에서

감격스런 목청으로 생명의 영원함을 증언했던

매미울음 소리를 다시 생생하게 떠올립니다

제 입술로 남을 먼저 핥아 주는 참생명과 생명들의 사랑

진실로 강한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배려와 절제

겨울새 같은 극기와 인내 앞에서

우리는 지금 목젖을 떨며 속으로 기도합니다

일본인이여, 지구라는 어머니의 품속에 함께 사는

귀한 생명들, 당신이 아프면 온 지구가 아픕니다

일본이여, 슬픈 당신을 오늘은 가장 빛나는 의자에 앉히고 싶습니다

부디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결코 쓰러지지 않았고

당신은 이미 새로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문정희 시인이 일본 지진 희생자를 위로하는 기고 시(詩)를 보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