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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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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방아는 다 찧었느냐.” 중국 선종의 오조(五祖) 홍인(弘忍)이 묻는다. 이에 혜능(慧能)은 “방아는 찧었지만 키질을 못하고 있다”고 대꾸한다. 그날 밤 삼경(三更), 혜능은 의발(衣鉢)을 전수받고 육조(六祖)가 된다. 이때 그릇이 철발(鐵鉢)이다. 속세의 ‘철밥통’이나 ‘철그릇’은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조사(祖師)의 신표(信標)로서 그 권위에 아무도 도전할 수 없다는 뜻에서다.

 그릇은 본디 담는 것이다. 용도와 재질에 따라 주발도 사기로 만들면 사발, 여자용은 바리, 국을 담으면 탕기, 이보다 작으면 조치보다. 김치는 보시기, 간장은 종지, 찬은 쟁첩이다. 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대접이 달라진다. 물을 담으면 물그릇, 금을 담으면 금그릇인 거다. 물론 청자나 백자는 담지 않아도 스스로 귀하지만.

 그릇은 물건만 담는 게 아니다. 사람의 그릇은 능력이나 도량이다. 국량(局量)이 크면 ‘큰 그릇’이다. 협량(狹量)한 이는 그릇이 좁쌀만 하다 한다. 책은 정신을 담는 그릇이요, 덕(德)은 천하를 담는 그릇이다. 이 가운데 으뜸이 밥그릇이다. 먹어야 사는 거다. 종교도 따로 없다. 스님은 밥그릇을 전하고, 성경의 주기도문도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그런데 한의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밥이란다. ‘밥이 보약’이기 때문이란 우스개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은 반찬이 필요 없다. 이때 ‘밥맛’은 생명의 맛이다.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고, 단·쓴·신·짠 맛을 넘어 가슴으로 맛보는 심미(心味)다. 이런 ‘밥맛’의 용례가 잘못 쓰이는 것 같아 유감스럽다. “쟤는 밥맛이야”가 대표적이다. 아마도 ‘밥맛 없다’거나 ‘밥맛 떨어진다’는 말을 줄여 ‘밥맛’이라 하다 여기에 ‘…이야’가 붙어버린 것 아닐까. 이제라도 ‘밥맛’에 제자리를 찾아주자. “사랑하는 당신, 정말 밥맛이야”처럼.

 최근 사법연수원생에 이어 변호사들까지 로스쿨을 두고 ‘밥그릇’ 다툼이다. 타계한 소설가 박경리도 『토지』에서 “결국 인간도 밥그릇 때문에 싸워온 거 아니냐”고 했다. 생존 문제란 얘기다. 그렇더라도 생존 걱정일랑 없을 법한 법조인들이 집단행동을 벌이는 모습에 국민은 ‘밥맛’이 떨어진다. 국회의원들도 못지않다. 봄나물이 제철인데, 돌아오려던 입맛까지 싹 가신다. 밥그릇은 차면 넘친다. ‘큰 그릇’은 아무리 채워도 넘치지 않는다. 법조인과 국회의원에게 밥그릇보다 ‘큰 그릇’을 바라라면 연목구어(緣木求魚)일까.

박종권 논설위원·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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