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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입법부의 혼란과 치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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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국회 행정안전위의 잘못된 정치자금법 개정안 처리로 인해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추락하고 입법과정이 혼란에 빠지는 등 파장이 커지고 있다. 행안위는 지난 4일 의원이 입법과 관련된 로비 후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을 기습적으로 의결했다. 법이 본회의를 통과해서 공포되면 청목회 로비 후원금 사건으로 기소된 행안위 소속 의원 6명은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법안은 의원들이 스스로 면죄부를 만든 것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개정 내용에 대해선 제대로 된 공청회도 없었고 법안 처리 일정도 졸속으로 마련돼 일종의 ‘합의 날치기’였다는 지적도 많다.

 비판 여론이 비등했는데도 한나라당 김무성,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3월 회기 중에 법안을 본회의에서 처리할 것임을 시사했었다. 동료 의원을 봐주고 전체 의원들의 정치자금을 확대한다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여론의 반감도 불사한 것이다. 여야를 초월해야 할 안보문제에서는 다투었던 여야가 정작 의원들의 폐쇄적 공동이익 앞에서는 여야가 없는 도덕적 해이를 보여준 것이다.

 7일 아침 비판적 여론을 의식한 청와대가 ‘대통령 거부권 행사 검토’를 시사하자 여야는 후퇴했다. 처리를 유보할 가능성을 비친 것이다. 제헌국회 이후 국회가 의결한 법안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모두 68건이다. 하지만 이번처럼 국회 본회의가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전에 대통령 거부권이 시사된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그만큼 청와대는 민심의 공분(公憤)을 읽은 것이다. 여론을 업은 대통령의 거부권 시사로 국회가 법률안 처리를 포기하게 되는 상황은 입법부가 굴욕과 혼란을 자초한 것이다. 상임위와 여야 지도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국민과 행정부에 대한 국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국회 스스로가 삼권분립(三權分立)의 기반을 갉아먹었다. 여야 원내대표와 안경률 행정안전위원장은 책임을 져야 한다.

 행안위를 통과한 개정안은 폐기되어야 한다. 내용도 논란이 많지만 무엇보다 법을 만드는 과정이 국민의 눈을 속였기 때문이다. 정치자금 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면 국회에 있는 정치개혁특위를 통해 충분한 토의와 공론화를 거치는 것이 마땅하다. 청목회 사건의 사법 처리 대상이 되고 있는 행안위 위원들이 이 법을 심의하는 건 고양이가 생선을 다루는 격이다. 그리고 정치자금 제도의 변화는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선거를 1년 앞둔 지금보다는 19대 국회에서 여유 있게 검토하는 것이 더 공정할 것이다. 여야 의원 50여 명은 직계존비속(부모와 자식)의 법 위반으로 후보자의 당선이 무효가 되는 현행법 조항을 없애는 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이 또한 전반적인 정치개혁 틀 안에서 신중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어렵게 열린 임시국회를 ‘면죄부 파동’이 삼키고 있다. 18대 국회를 보면서 유권자들은 내년 4월 19대 총선 때 국회를 어떻게 개혁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