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공정사회, 국회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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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행안위)의 정치자금법(정자법) 개정안 통과는 정치인들의 후안무치(厚顔無恥)를 보여준 사건이다. 4일 행안위는 정자법 개정안을 기습적으로 통과시켰다. 당초 일정에 잡혀 있지도 않았던 개정안을 갑자기 상정해 별도 토론도 없이 통과시켰다.

 정자법 개정안 기습 처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국회의원들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먼저 법 개정의 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번에 고친 것은 3개 조항이다. 각 조항 모두 국회의원이 정치자금을 쉽게, 많이 받을 수 있는 쪽으로 바꾸었다. 제31조 ‘기부의 제한’을 풀었다. 현행법에 따르면 개인만 정치자금을 낼 수 있는데, 개정법이 시행될 경우 기업이나 각종 이익단체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제32조 ‘특정행위와 관련된 기부의 제한’도 풀었다. 국회의원이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정치자금을 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입법로비용 정치자금을 받겠다는 것이다. 제33조 ‘기부의 알선에 관한 제한’도 풀었다. 강요에 의한 기부 외에는 모두 가능하게 된다.

 이번 개정안은 한마디로 ‘돈 안 드는 선거’에 역행하는 것이다. 현행 정자법은 2004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도해 돈정치 풍토를 혁신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속칭 ‘오세훈법’은 금권선거의 원인이 되는 기업·단체의 거액 정치자금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대신 많은 유권자들의 정치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소액후원금을 장려하는 내용이다. 돈정치에 대한 자성 차원에서 만들어진 법이라 매우 엄격했고, 그래서 정치인들이 현실적으로 돈가뭄의 어려움을 겪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법을 개정하면 오세훈법은 사실상 형해화(形骸化)된다. 깨끗한 정치를 위한 노력을 뒤엎는 시대역행이다. 행안위에서 통과한 개정안이 그대로 확정될 경우 기업이나 이익단체의 정치자금이 쏟아질 것이며, 돈이 입법을 좌우하는 금권정치의 폐해가 심각해질 것이 분명하다.

 이번 법 개정의 또 다른 문제는 타이밍이다. 정자법 개정 논의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정치판에선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지만 여론의 반대가 불 보듯 뻔한 사안인 만큼 온갖 논의가 무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뾰족한 묘안이 없는 가운데 개정이 계속 미뤄져 왔다. 그러다 이번에 행안위에서 법안을 전격 처리한 것은 다음 달 정자법 위반으로 기소된 국회의원들에 대한 선고가 예정돼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청목회(청원경찰친목회)란 단체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받고 있는 여야 국회의원 6명은 정자법이 개정될 경우 벌을 받지 않게 된다. 처벌의 근거가 되는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료 국회의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법을 만드는 데 여야가 따로 없었다. 늘 부르짖던 공정사회도, 정치개혁도 찾을 수 없다. 아직 늦지 않았다. 개정안은 정치개혁특위와 법사위, 그리고 국회 본회의를 거쳐야 확정된다. 그 과정에서 이번 개정안을 폐기해야 한다. 좋은 방향이면 법 개정은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개악(改惡)은 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