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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홍 “TV서 문어 보면 난 로봇 다리를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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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올 1월 29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데이토나 국제자동차경주장. 두 대의 차가 경사진 트랙을 돌았다. 한 대는 흰색 밴, 다른 한 대는 청색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었다. 앞서 달리던 밴에서 종이박스들이 떨어졌다. SUV는 이리저리 박스를 피한 후 밴을 추월했다. 2.4㎞ 트랙을 완주한 뒤 SUV에서 운전자가 내렸다. 그의 손에는 흰색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마크 리코보노, 미국시각장애인협회(NFB) 임원이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시각장애인 아내를 끌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리코보노가 이날 운전한 차는 특수 장비를 부착한 시각장애인용 자동차였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서 개막한 TED 콘퍼런스의 첫 한국인 강연자 데니스 홍(한국명 홍원서·40) 버지니아 공대 교수의 ‘작품’이다. 그는 3일 강연 때 이 차를 전 세계에 소개할 예정이다. 28일 리허설을 앞두고 홍 교수를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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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공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시각장애인용 차를 만들게 된 계기는.

 “2007년 미 국방부 산하 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개최한 무인자동차 경진대회에 출전해 3등을 했다. 당시 NFB가 시각장애인용 차를 공모했는데 아무도 응모를 안 했다. ‘미쳤다’는 반응이었다. 다들 불가능하다니까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무인자동차 기술을 활용하면 가능하겠다 싶었다.”

-일반 도로도 달릴 수 있나.

 “그러자면 신호등이나 교통표지판 등을 인식하는 기능이 필요하다. 하지만 개발을 미루고 있다. 이 차가 실용화될 때쯤이면 교통 인프라 자체가 바뀔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교통신호를 무선 인터넷 등으로 쏘아준다면, 현재와 같은 신호등을 인식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언제쯤 실용화가 가능할까.

 “기술적으론 10년 내에 가능하다. 문제는 사회적 인식이다. 운전면허증을 발급하는 정부와 자동차보험 회사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 차를 만든 뒤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줘서 고맙다’는 편지를 수백 통 받았지만 ‘안 그래도 교통 사고가 많은데, 위험하게 왜 그런 차를 만들었느냐’는 항의 편지도 받았다.”

-기술적으론 어떤 의미가 있나.

 “차는 응용수단(application)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비(非)시각 인터페이스다. 시각 의존도가 높은 차에서 성공한다면 다른 분야에서도 쉽게 적용이 가능하다. 달에 사람을 보내는 아폴로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인공위성·휴대전화가 발달한 것처럼, 파급 효과가 큰 스핀오프(spin-off) 기술이다. 일반인이 모는 차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거다.”

-로봇은 안 만드나.

 “물론 로봇 연구도 계속하고 있다. 최근 미 해군에서 큰 프로젝트를 따냈다. 함정 내에서 돌아다니며 불을 끄는 소방로봇이다. 해군에서 소방호스 자체를 로봇으로 만들자고 했는데, 우리가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로 만들자고 했다.”

-이유는.

 “함정은 사람에 맞게 설계됐다. 계단이 있고 문턱도 높다. 사람을 닮은 로봇이 유리하다.”

-로봇공학자가 된 계기가 있었나.

 “일곱 살 때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R2D2·C3PO 같은 로봇을 보고 넋이 나갔다. ‘커서 꼭 로봇 박사가 돼야지’하고 결심했다.”

-과학자 집안에서 자란 것도 영향이 있었나.

<※홍 교수의 아버지는 국방과학연구소 항공우주담당 부소장, 인하대 교수, 한국항공우주학회장을 역임한 홍용식 박사다. 형 존 홍(한국명 홍준서)은 미국국방연구원(IDA), 누나 줄리 홍(한국명 홍수진)은 미국국립보건원(NIH)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런 것 같다. 식구들끼리 모이면 식사자리에서도 과학 얘기만 했다. 어릴 때 믹서기·TV 등을 닥치는 대로 뜯어봤는데 한번도 아버지께 혼난 적이 없다. 그냥 장난친 게 아니라 안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그랬다는 걸 이해해 주신 거다.”

-미국 과학잡지 ‘파퓰러 사이언스’가 ‘과학을 뒤흔드는 젊은 천재 10인’ 중 한 명으로 꼽았다. 어려서부터 천재기가 있었나 보다.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창의적이고 남들보다 아이디어가 많을 뿐이다.”

-예를 들면.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결 지어 생각해 보는 경우가 많다. 가령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보다가 문어가 나오면, 문어의 움직임을 로봇 다리에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식이다.”

-창의적인 사고의 비결이 있나.

 “어려서부터 여행을 많이 한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여행은 노는 게 아니라 산 교육(live education)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것을 보다 보면 자극을 받게 된다.”

 홍 교수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한국에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미국 생활은 대학을 다니던 도중 유학을 떠나며 시작했다.

롱비치(미국)=김한별 기자

민세희씨, 펠로 콘퍼런스 강연

이날 롱비치공연예술센터 내 시어터에선 TED 콘퍼런스 본 세션에 앞서 펠로 콘퍼런스가 열렸다. 한국인 최초의 TED 펠로 민세희(35·사진)씨는 전력소비량에 따라 집 크기가 달라지는 데이터 시각화(data visualization) 작업을 선보여 400여 관객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TED=기술(Technology)·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디자인(Design)의 머리글자로 첨단 기술과 지적 유희, 예술과 디자인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행사다. 다보스 포럼이 ‘거대담론’을 논하는 자리라면 TED는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나누는 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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