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이먼 조 “미국 불법 체류자였다, 죽기 살기로 달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2면

16년 전 스케이트를 좋아하는 다섯 살 꼬마가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캐나다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밀입국했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후 6년을 불법체류자로 살아야 했다. 그때는 불법체류란 게 뭔지도 몰랐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유년시절의 기억엔 ‘낯섦’ 두 글자만 선명하다. 하지만 멀게만 느껴진 미국 땅에서도 그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스케이트가 있었다. 스케이트를 타고 얼음판을 질주할 땐 마냥 신났다. 유색인종에 대한 선입견은 실력으로 극복했다. 20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막을 내린 국제빙상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6차 대회 500m에서 41초070의 기록으로 우승한 한국계 미국 대표 사이먼 조(20·한국명 조성문·사진) 이야기다. 13일 러시아에서 열린 월드컵 5차 대회 500m 우승 후 1주일 만에 이룬 또 하나의 쾌거다. 미국에서 500m는 우리와 악연이 있는 아폴로 안톤 오노가 주름잡던 분야다. 할리우드 액션에 빼앗겼던 1인자의 자리를 한국인이 다시 실력으로 되찾은 것이다. 사이먼은 두 개 대회 연속 우승으로 2010~2011 시즌 500m 종합 1위에 올랐다. 단거리 세계 최강자로 우뚝 선 것이다. 대회를 마치고 미국에 돌아온 사이먼 조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LA중앙일보=박상우 기자 swp@koreadaily.com

●데뷔 후 첫 세계 정상인데요 기분이 어떤가요?

 “우승까지 하게 돼 저 자신도 깜짝 놀랐습니다. 지난해와 비교해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여름 시즌 동안 헝그리 정신으로 이를 악물고 연습했는데 그것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또 아폴로 (안톤 오노) 형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목표의식을 갖고 연습하다 보니 효과가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실력이 점점 좋아지면서 자신감도 많이 붙었고요.”

●대회 준비는 어떻게 했나요?

 “전재수 감독님과 여준형 코치님 밑에서 오전·오후로 나눠 실시하는 8시간 맹훈련을 소화했습니다. 처음엔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미국 선수들도 훈련이 너무 힘들어 불만을 갖는 선수까지 생겼을 정도였으니까요. 미국 선수들은 정해진 시간 외에 추가 연습도 없을뿐더러 ‘즐겁게(enjoy)’를 강조하는 레크리에이션식 훈련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한국 특유의 스파르타식 훈련에 적응을 잘 못하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모든 선수가 전 감독님과 여 코치님을 인정하고 잘 따릅니다. 다들 실력이 향상되고 성적이 좋아지고 있거든요. 혹시 때리면서 가르치지는 않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건 절대 없습니다.(웃음)”

●감독, 코치님과의 호흡은 어떤가요?

 “아무래도 제가 한국인의 피가 흐르다 보니 눈빛만 봐도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딱 알 수 있습니다. 전 감독님과 여 코치님은 제게 은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를 많이 밀어주셨거든요. 전 감독님은 제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시고는 밴쿠버 올림픽 선발전이 열리기 전 8명의 훈련팀에 저를 포함시키려고 하셨죠. 미 빙상연맹 회의에서 반대해 결국 없던 일이 됐지만요. 하지만 전 감독님은 저를 유타주로 이사 오라고 하면서 클럽팀에 몸담고 있던 여 코치를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전 밴쿠버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국가대표가 될 수 있었죠.”

●한국 선수들과도 친한가요?

 “물론입니다. 한국 선수들과 고루고루 다 친합니다. 대회 때마다 만나면 항상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 안부를 묻곤 하죠. 특히 밴쿠버 올림픽 때 함께 뛰었던 이호석·성시백 선수와 친한데요, 평소에도 트위터와 페이스북, 블랙베리 메신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습니다.”

●월드컵에서 1위를 차지했는데 다음 목표가 있다면요?

 “우선 세계선수권대회 1위입니다. 당장 다음달에 영국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리는데요. 22일 하루 쉬고 23일부터 연습에 들어갑니다. 앞으로는 체력훈련에 초점을 맞춰 전 종목에서 고른 성적을 내는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최종 목표는 모든 쇼트트랙 선수의 꿈인 올림픽 금메달이죠. 2014년 러시아 소치 올림픽 때 꼭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습니다.”

●경쟁 상대는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당연히 한국팀 친구들입니다. 이번 독일 월드컵 대회 때는 한국팀의 성적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선수들과 코치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한국 남자팀의 실력이 세계 최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팀을 비롯해 대부분의 팀이 한국팀을 경계대상 1호로 생각하죠. 그래서 연습방식도 많은 팀이 한국식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저도 이번 시즌에는 한국팀을 많이 쫓아갔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여가시간은 어떻게 보내나요?

 “시합이 코앞일 때는 훈련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쉽니다. 훈련 때문에 집에 오면 파김치가 되거든요. 가끔 여유가 있을 때는 한국영화를 즐겨 봅니다. 최근에 본 영화 ‘아저씨’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한국 연예인 중에 김태희 누나를 좋아합니다. 예전에 한국 갔을 때 TV에서 얼핏 봤는데 정말 예쁘더라고요. 하하. 요즘에는 페이스북과 트위터도 즐겨 합니다. 페이스북(www.facebook.com/pages/Simon-Cho/181314096611)에는 친구가 2500명 정도가 등록돼 있고, 트위터(twitter.com/TheRealSimonCho) 팔로어는 5300명이 됩니다.

●‘불법체류자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곤 하는데 그런 과거가 짐이 되진 않나요?

 “불법체류자였던 과거가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했던 거죠. 한마디로 헝그리 정신 아니겠어요. 다행히 힘든 시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고 강하게 클 수 있었습니다.”

●시민권을 취득하고 합법적인 신분이 된 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2001년에 영주권을, 2004년에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신분은 해결됐지만 부모님의 사업이 잘 안 돼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밴쿠버 올림픽 대표팀 선발전을 앞두고 스케이트를 그만두려 했습니다. 쇼트트랙이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인데 저를 뒷바라지하는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 죄송스러웠거든요. 그때 부모님께서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선발전에만 집중하라’고 격려해 주셨어요. 전 그 소리를 듣고 죽기살기로 운동했죠. 결국 대표팀에 뽑혔고 5000m 계주에서 동메달까지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미 국가대표라는 화려한 겉모습 이면에 힘든 점은 없나요?

 “미국에서는 대표팀으로 뽑혀도 스케이트 부츠나 블레이드 등 장비는 개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보통 부츠는 2000달러(225만원), 블레이드는 600달러(67만원)가 듭니다. 부츠는 1년에 1개, 블레이드는 3~4개가 필요합니다. 또 국가대표 선발전 같은 국내 대회 참가를 위한 숙박비도 개인 돈으로 해결해야 하고요. 많은 분이 미국 대표팀은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메달을 따도 다른 나라에 비해 보상도 적죠. 지난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겐 2만4000달러(2700만원), 은메달에겐 1만5000달러(1690만원), 동메달에겐 1만 달러(1120만원)가 상금으로 주어졌습니다. 이렇다 보니까 아폴로 형처럼 광고도 많이 찍고 스폰서도 많은 몇몇 선수만 돈 걱정 할 필요가 없는 거죠. 이제 500m에서 세계 1위가 됐으니 저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겠죠. 하하.”

●한국 팬들에게 한마디 해주시죠.

 “미국에는 친구들도 많고 응원해 주시는 분도 많지만, 제가 태어난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미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있고 미국 시민권자지만 저는 늘 한국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요. 앞으로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전재수 감독이 보는 선수 사이먼 조

 사이먼 조를 조련하고 있는 전재수(41) 감독은 이제 남자 쇼트트랙에 ‘사이먼 시대’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그만큼 사이먼의 재능이 출중하고 성장 폭이 크다는 것이다.

 사이먼을 ‘실질적인 미 대표팀 에이스’라고 치켜세운 전 감독은 “스타트, 가속력 등 500m에선 이미 세계 정상급”이라며 “성시백 선수와 닮은꼴”이라고 말했다.

 특히 전 감독은 사이먼의 인성을 높게 평가했다. 어렸을 때 힘든 시기를 잘 극복한 만큼 겸손하고 성실하다는 것이다. “쇼트트랙은 터프한 종목인 만큼 정신적으로 강하지 않으면 버티기 쉽지 않다”며 “사이먼은 노력형인 데다 스케이트에 대한 열정도 많아 롱런할 재목”이라고 말했다.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에 대한 청사진도 밝혔다. 전 감독은 “아직 나이가 어린 만큼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며 “훈련량을 늘리고 경험만 좀 더 쌓는다면 1000·1500m 등 장거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다”고 예상했다.

 전 감독은 “미국 대표팀을 이끌고 있지만 한국인인 사이먼이 잘해줘서 무척 대견스럽다”며 “다른 선수들과의 형평성 때문에 특별히 더 잘 해줄 순 없지만 언제나 응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버지 조정행씨가 보는 아들 조성문

 사이먼 조의 아버지 조정행(57)씨는 기량이 일취월장하는 아들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특히 유럽과 캐나다가 강세인 500m에서 아들이 1위를 차지한 비결로 순발력을 꼽는다. 조씨는 “지구력은 훈련을 통해 길러질 수 있지만 순발력은 타고나야 한다”며 “사이먼은 어렸을 때부터 순발력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조씨는 사이먼이 세 살 때 스케이트를 처음 시켰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자그마한 체구에서도 세계적인 선수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다. 다행히 아들도 스케이트 타는 것을 좋아했다. 이제 국가대표도 됐고 대회에 나가 1등도 하고 경사지만 속상할 때도 많았다. 아무래도 피부색이 다르다 보니 아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당할 때 특히 안타깝고 속상했단다. 하지만 사이먼은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조씨는 “화가 날 법도 한데 사이먼은 항상 남의 탓을 하지 않았다”며 “실력이 다른 선수보다 월등하면 그런 일도 없을 것이라며 자신을 더욱 채찍질했다”고 말했다.

 요즘엔 아들한테 미안하기만 하다. 경제적으로 전폭적인 후원을 해줄 처지가 못되기 때문이다. 조씨는 “성문이가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인데 자꾸 경제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안타까워했다.

j 칵테일 >>
카네기 재단서 ‘올해의 이민자’ 선정

사이먼 조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지난해 7월 카네기 재단이 선정한 ‘올해의 이민자’에 선정됐다. 각국 출신 46명 가운데 한국 출신으로는 사이먼 조와 강석희 캘리포니아주 어바인 시장이 이름을 올렸다. 뉴욕에 있는 카네기 재단은 2006년부터 매년 미국 독립기념일(7월 4일)을 즈음해 성공한 미국 이민자들을 선정해 뉴욕타임스에 ‘이민자-미국의 자랑’이라는 전면광고를 내왔다.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인 재단 창설자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해의 이민자’를 뽑아온 것이다.

 사이먼 조는 이민 개혁 전도사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민 개혁을 주요 국정 과제로 내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는 정치인들과 언론에 자신의 불법 입국 경험을 담담하게 털어놓으며 이민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이민자에게 기회의 땅이었던 미국이 이제는 이민 오는 것 자체가 어렵고 거주하는 것도 위협받고 있다”며 “내 이야기가 이민개혁법안 통과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