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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식 전 부총리의 쓴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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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서경호
경제부문 기자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해 말 발간한 『국가가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는 경제기획원에서 물가정책국장·경제기획국장·예산국장 등을 거쳤고 1982년 재무부 장관, 83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 후 국회의원을 하다가 10여 년 만인 97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으로 복귀했다. 임기 막판에 외환위기를 겪는 아픔도 있었다. 책 속에는 숨가쁘게 개발연대를 달려온 경제 관료의 체험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는 공직에 있으면서 대통령 여럿을 모셨다. 전두환 대통령 비서실장을 한 사람이 어떻게 김영삼 대통령 밑에서 경제부총리를 맡느냐는 소리도 들었단다. 대답은 이랬다. “이상한 일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려운 나라 경제를 바로잡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지 김영삼 대통령을 중심에 두고 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통령보다는 나라가 먼저였다. 그러다 보니 일하는 자세도 대통령 지시라고 곧이곧대로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앞서 나라의 잣대로 먼저 검증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요즘 장관들이 이 말에 얼마나 공감할지 참 궁금하다.

 72년 말 물가정책국장을 맡게 된 그의 앞에 놓인 절체절명의 임무는 ‘3% 물가안정’이었다. 물가국장으로 15개월 일하면서 절반은 물가를 잡는 데, 나머지 절반은 물가를 올려주는 일로 정신 없이 바빴다. 당시는 ‘요즘과 달리’ 정부가 물가를 틀어쥐고 있을 때였다. 매일 대책회의를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물가안정보다는 3% 물가목표 달성을 위한 ‘물가지수 관리’에 매달렸다.

 업계는 꾀를 냈다. 과자 함량을 줄이거나 이름만 바꿔 신제품을 내놓고 값을 올리는 편법이 성행했다. 당국은 애써 이를 외면했다. 소주 원료인 주정가격은 올랐지만 소주가격은 계속 묶었다. 그랬더니 업계가 소주 도수를 25도에서 20도로 낮췄다. 의외로 소비자 반응이 좋았고, 물가 규제 덕분에 새로운 트렌드가 생기는 웃지 못할 사연도 있었다. “행정력으로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나아가 소비자는 물론 기업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절감했다.”

 그는 “정부는 해결사가 아니다”고도 했다. 기업과 시장도 문제라는 거다. 경제개발 초기, 정부는 심판 노릇을 하기보다 운동선수(기업)와 함께 뛰었다. 그 버릇이 남아 지금도 걸핏하면 정부에 손을 내민다는 거다. 지금 정부도 당장 물가대책을 내놓으라는 요구와 물가 관치가 심한 것 아니냐는 비판 사이에서 고심하고 있다.

 개발시대 관료의 아내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강 전 부총리는 젊을 때 이사를 몇 차례 다녔지만 한 번도 이사를 도운 일이 없다고 했다. 늘 이사하기 전 집에서 출근해 퇴근 후 새 집으로 찾아갔다. 요즘 젊은 공무원들, 이랬다간 아마 집에서 당장 찬밥 대우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나랏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희생하고 내조해준 아내에게 이 책을 바쳤다. 개발연대 빛나는 성취의 이면에는 기업가·관료, 그리고 아내가 있었다.

서경호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