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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발효시켜 갖은 양념, 석화젓은 겨울이 준 행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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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호 10면

겨울이 지나가니, 이제 트럭에 스티로폼 박스 싣고 오는 굴 장수도 사라지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굴은 대표적인 겨울 식재료다. 김장철에 먹기 시작한 굴은 2월 말과 3월 초까지 식탁을 풍성하게 해준다. 그냥 생으로 양념 초간장이나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도 좋고, 오로지 소금과 파·마늘·고춧가루·깨소금만으로 깔끔하게 무쳐도 기막히게 맛있다. 워낙 재료의 맛이 뛰어나니 어떻게 먹어도 맛이 없을 수 없는 재료가 굴이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49> 돌에서 피는 꽃, 석화

한동안 굴에 푹 빠져 겨울에 온갖 굴 요리를 해먹던 때가 있었다. 수산시장이나 길거리 행상에게서 한 박스 사다 놓고 원 없이 먹었다. 싱싱할 때 회로 먹기 시작해 휴일 점심 때는 굴밥을 해 먹었다. 바쁜 아침에 마땅한 국이 없거나 밤늦게 출출해 따끈한 국 생각이 나면 굴국을 끓였다. 그냥 달걀 푼 것에 굴을 섞어 한 알씩 끓는 물에 떠 넣어 익히고 조선간장과 마늘에 파를 넉넉히 넣으면, 그야말로 5분 만에 뚝딱 국이 완성되니 이보다 간편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다 점점 난이도가 높은 굴 요리에 다가가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석화젓, 즉 굴젓과 굴튀김이다.

굴튀김은 기름기 많은 음식을 좋아하는 내 취향의 요리다. 남편은 원래 맛있는 굴을 뭐 구태여 튀김까지 해 먹어야 하느냐고 하니, 오로지 내가 먹고 싶어서 우기고 우겨 해 먹는 음식이라 할 수 있다. 튀김용 굴은 알이 굵고 값도 싼 양식굴이 적당하다. 기름의 고소한 맛이 강해 특별히 비싼 자연산을 쓸 이유가 없다. 소금물에 씻고 체에서 물기를 잘 뺀 굴을 밀가루, 달걀 물, 빵가루를 묻혀 튀겨낸다.

가장 힘든 지점은 가끔 “뻥” 하고 기름이 튄다는 것이다. 머금고 있던 물기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셈인데, 밀가루를 비교적 충실히 잘 묻히면 좀 덜하다. 달착지근한 굴에 고소한 튀김옷이 어우러지는 맛이 기가 막히지만, 기름 튀는 것이 겁나고 남은 튀김기름 처리가 귀찮을 때는 손쉽게 굴전으로 우회한다. 밀가루와 달걀 물만 씌워 팬에 얌전하게 부쳐 내면 된다. 튀김의 바삭거리는 맛은 없어도 역시 고소한 기름과 어우러진 달착지근한 맛, 여기에 향긋한 겨울 굴향이 일품이다.

그러나 굴튀김과 굴전은 너무 달착지근하고 고소한 맛이 강해 많이 먹으면 느끼하다. 특히 밤에 맥주와 함께 먹으면 과식해 속이 느끼해지기 십상이다.
굴의 화려한 향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깔끔한 반찬으로 먹고 싶다면, 단연 석화젓이 최고다. 석화젓은 우리 맏동서 형님의 주 장기다. 형님은 해남 출신으로 기막힌 음식 솜씨를 지녔는데, 명절 때는 온갖 나물을 맛깔나게 볶아내는가 하면 매생이국 같은 전남 바닷가 음식으로 나 같은 서울내기를 놀라게 한다. 형님은 굴젓을 꼭 ‘석화젓’이라 부른다. 이 화려한 맛을 ‘굴젓’이라 불러버리면 너무 투박하다는 것이다. 석화(石花), 돌에서 피는 꽃, 이 정도 아름다운 이름은 붙여줘야 이 젓갈의 화려한 맛과 제대로 어울린다는 것이 형님 주장이다. 게다가 자잘하고 향이 강한 자연산 굴을 써야 하는데, 이 정도 형용사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사실 굴젓을 만드는 방식은 다양하다. 가장 쉽게 하는 방법은 굴에 무·배·파·마늘·고춧가루 등을 넣고 멸치액젓과 소금을 섞어 버무리는 것이다. 버무린 첫날부터 먹기 시작해 냉장고에서 열흘 정도는 두고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이것은 젓갈이라기보다는 그냥 무침이라 하는 편이 옳다. 소금에 무친 것보다는 젓갈 맛이 나는 게 사실이지만, 그건 굴이 발효해 생긴 맛이 아니라 멸치액젓으로 생긴 맛이다. 버무린 지 며칠 지나면 멸치액젓이 굴 안에 스며들고, 굴도 약간 발효해 맛이 좀 더 깊어지지만 그래도 역시 이 정도는 무침이라 봐야 한다.

형님표 석화젓은 이것보다는 훨씬 난도가 높다. 약간 강한 소금물에 굴을 씻어 그릇에 담아 그냥 실내의 상온에 둔다. 2~3일이 지나면 표면이 노르스름하게 변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소금과 고춧가루·마늘·통깨 등과 무를 작고 납작하게 썰어 절인 것을 넣고 버무린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숙성시키면 무와 굴, 나머지 양념이 잘 어우러지면서 약간 새콤한 맛이 감도는 듯 숙성된 향긋한 굴젓이 된다. 이 방식은 확실히 무침과는 다른, 발효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겁 많은 나는 이 형님표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하기에 좀 겁이 났다. 소금 간도 하지 않은 굴을 그대로 상온에 방치하니 상하면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와서 고백하거니와, 나는 형님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약간 변형을 했다. 아예 굴에 소금을 좀 넉넉히 넣어 실내 상온에서 발효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해보니, 굴이 절어 물이 우러나왔고, 그것들이 노르스름하게 발효될 때까지의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렸다. 일주일을 넘기니 노르스름하게 굴이 발효되기 시작했고, 이때 소금을 더 넣어 간을 맞추고 무와 양념들을 버무려 숙성시켰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내 방식은, 서산 등 서해안에서 어리굴젓을 담그는 방식과 형님 방식의 중간쯤에 위치한 것이었다. 서산 간월도 등에서 굴젓을 담글 때에는, 소금을 미리 모두 넣어 강하게 간을 하여 15도쯤의 온도에서 20일간이나 발효시킨다고 한다. 굴에서 우러나온 물이 노랗게 더 많이 익도록 두는 것이다. 20일 발효시켜 이미 굴젓이 된 것을, 고춧가루 등으로 양념한 것이 어리굴젓이란다.

어떻게 하더라도 집에서 만든 굴젓·석화젓은 시장에서 파는 어리굴젓보다는 양념이 순하고 맛이 담백하다. 시장에서 흔히 구입할 수 있는 어리굴젓들은 지나치게 짜고, 그 맛을 가리려고 물엿과 고춧가루를 너무 많이 들이부어 지나치게 달고 맵다. 그러니 굴 특유의 향이 아니라 달고 매운 양념 맛으로 먹게 되는 것이다. 집에서 만든 굴젓이 단맛이 지나치게 적다 싶으면 그때 꿀이나 올리고당으로 약간의 단맛을 첨가하는 것으로 족하다.

굴향이 은은히 살아 있는 진짜 굴젓을, 갓 지어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밥 위에 척 얹어 입에 넣어보라. 이렇게 행복하게 겨울이 지나가는구나 싶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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