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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75)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20

남자가 나를 알아본 것도 같고 알아보지 못한 것도 같았다. 넋이 빠진 듯 눈빛이 휑했다. 피켓을 들고 샹그리라에 찾아온 날보다 더 깡마르고 더 잔주름이 늘어난 얼굴이었다. 나는 삶은 돼지고기를 쌈으로 싸서 우적우적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내가 술을 잘 못한다는 것은 꽁지머리도 이미 알고 있었다. M자머리와 꽁지머리가 저희들끼리 소주잔을 빠르게 비워냈다. 남자는 주방 구석에 우두커니 돌아서 있었다. 공포감이 남자의 병약한 어깨에 얹혀 있었다. 남자는 심하게 두들겨 맞아서 치매에 걸린 것처럼 얼이 빠졌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많이 두들겨 맞고 산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맡을 수 있는 본능적 후각이었다. “이사장님 만나게 해주세요, 제발요!”라던 남자의 말이 귓구멍 속에서 재생됐다.

“부탁이에요. 제발…… 우리 현…… 현주를…….”이라고, 남자는 애원했다. 현주는 분명히 애기보살의 본명이었다.
“아홉시에 막차가 있을 게야.”
M자머리가 말했다.
“저녁 먹고 나서, 함께 나가세. 어차피 나도 시내로 나가야 하니까. 막차 타면 열한시 전엔 샹그리라에 도착할걸세.”
“아, 네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 대답했다.
남자가 물그릇을 들고 오다가 꽁지머리의 앞발에 쏟은 것은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키가 아주 작은 남자였다. 꽁지머리의 구둣발이 남자에게 향하려는 것을 M자머리가 얼른 제지했다. 키 작은 남자는 그 사이 공포에 질려 주방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물기를 서둘러 닦았다. 남자의 손끝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였으며 동시에 어떤 추종이었다.

공포에 가득 찬 개의 눈빛이 떠올랐다.
산 채로 목매달면, 어떤 개는 주둥이만 쩍쩍 벌리며 거품을 쏟아낼 뿐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특히 특수부대 ‘대장’이 웃통을 벗어부치고 다가들기만 해도 온몸을 부르르 부르르 떨며 오줌을 지리는 개들도 있었다. ‘우리들의 대장’이라고 불렸던 그 장교는 개를 손과 발만으로도 제압했다. 끌려가지 않으려는 개의 머리를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서 박살낸 적도 있었다. 특히 그의 발길질은 빠르고 엄혹했다. 특별히 주문해서 신는다고 알려진 가죽신을 신고 있었는데, 그 구두 끝에 찍혀 쓰러지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구두 앞부리와 뒷굽에 징을 박았다는 말도 들었다. 길을 잃어 부대 안으로 들어온 어린 멧돼지를 대장이 단 한 번의 발길질로 제압했다고 그의 부하들은 외경감에 가득 차서 말했다.

멧돼지의 전두부가 함몰되고 앞니가 여러 개 부러졌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의 발길질 한 번에 정강이머리뼈가 그만 부러진 적이 있었다. 쇠망치로 얻어맞는 것 같았다. 앞부리에까지 징을 박은 모양이었다. 두 달이나 깁스를 하고 있어야 했다. 경찰에 신고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신고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 특수부대를 건들 수 있는 사람은 근동에서 아무도 없었다. 누구든 실컷 맞고 나면 때린 자에게 깊이 의존하는 관성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저항감이나 분노는커녕 오히려 때리는 자를 신처럼 추앙하고 의지하게 되는 관성이었다. 특수부대 대장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꽁지머리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터였다.

식사가 다 끝났다.
남자가 그릇들을 개수대로 옮길 때 M자머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좀 옮겨 드릴게요.” 내가 말하고 그릇들을 들고 개수대 쪽으로 갔다. 때마침 꽁지머리는 화장실에 가고 없었다. 키 작은 남자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나를 훑고 지났다.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 해도 꽁지머리가 자리를 떴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다. 이번엔 나를 알아보는 눈치가 역력했다. 남자의 젖은 손이 앞섶을 스치고 지났다. 주머니에 뭔가를 밀어 넣는 것 같았다.

눈은 그쳐 있었다.
그곳에서 차로 30여 분쯤 되는 거리에 있는 작은 시(市)에 M자머리의 살림집이 있다고 했다. 키 작은 남자는 주방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었고, 꽁지머리만이 문 밖까지 우리를 배웅했다. 어느 방향에선가 깊이 앓는 듯한 비명소리 같은 것이 잠깐 들렸으나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뒤에 남은 ‘제석궁’은 어두컴컴해서 마치 악마의 토치카 같았다. “아까 부엌일 하는 친구, 자네도 누군지 알아봤지?”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M자머리가 물었다. 내 눈빛을 관찰했던가 보았다. 이럴 때 거짓말은 나쁜 전략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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