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기술의 복합체로 불리는 한국형 고속철도가 너트 한 개 때문에 넘어졌다. 광명역의 KTX 산천 탈선사고 원인으로 지목된 컨트롤박스는 레일 옆에 붙어 있다. 고속철도역의 신호체계실에서 선로전환기를 통해 신호를 보내면 실제로 레일을 움직여 선로를 연결하는 장치다.
열차가 정차하거나 선로를 바꿀 때 사용되는 이 장치는 레일을 움직인 뒤에는 선로에 고정시키는 역할까지 한다. 한국철도기술연구원 김용규 열차제어통신연구실장은 13일 “컨트롤박스 안에는 레일을 이동시킨 뒤 고정시켜 주는 컨트롤러가 있다”며 “컨트롤러가 이상이 있으면 움직인 레일을 고정시켜 주지 못해 열차가 탈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광명역에서는 KTX 산천 탈선사고가 발생한 11일 새벽 컨트롤박스에 대한 정비작업을 했다. 자정부터 오전 4시까지 열차가 다니지 않는 시간대를 이용 했다. 하지만 오전 6시쯤 열차가 운행하기 시작하면서 컨트롤박스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가 신호체계실 모니터에 세 차례 떴다. 김 실장은 “열차가 운행하면서 비정상적으로 진동이 발생하자 컨트롤러의 전기 접점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이상 신호가 전달됐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토해양부 관계자도 “이상 신호가 들어왔을 때 KTX 운행을 일시 중단시킨 뒤 컨트롤박스를 제대로 정비했으면 탈선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광명역 측은 임시조치만 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부산을 오가는 열차가 이용하는 레일의 신호체계만 이상이 없는지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열차가 방향을 바꿀 때 다리를 놓는 것처럼 움직이는 컨트롤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는 점검하지 않았다. 사고 열차는 부산에서 광명역까지만 운행하는 열차였다. 이 열차는 차량을 세우기 위해 부산에서 올라오던 레일에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레일로 진입했다. 광명역에 승객을 내린 뒤 레일을 바꾸지 않고 하행선을 타고 곧장 부산으로 가기 위해서다. 이때 레일을 연결해 준 것이 컨트롤박스다. 하지만 컨트롤러가 레일을 사선으로 움직여 다리는 놓아 줬지만 움직인 레일을 고정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열차의 앞부분은 무사히 레일에 올라섰지만 후미가 이동할 때는 탈선해 버린 것이다.
국토부 측은 KTX 산천의 컨트롤박스 정비 불량을 탈선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다른 가능성도 열어 놓고 있다. 고속열차의 안전운행은 차체는 물론 신호체계, 열차가 지나는 레일, 전기를 공급하는 전차선 등과 복합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너트가 직접적 원인으로 보이지만 전체 시스템도 봐야 한다는 뜻이다.
항공철도사고위원회 박창규 사무국장은 “컨트롤박스에 대해 우선 조사하겠지만 선로전환기·차량·레일·기관사 등에 대해 전면적 조사를 할 방침”이라며 “서너 달 이상 조사해야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속열차도 블랙박스가 있긴 하지만 속도 등에 관한 운행 기록만 담긴다.
국토부는 선로전환기 자체의 문제도 조사할 방침이다. 선로전환기의 문제라면 고속철도의 신호체계 작동 기록이 초 단위로 남아 있는 고속열차제어시스템(CAMS) 파일을 분석하면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레일에 자갈 같은 이물질이 얹혀져 있거나 부식돼 변형돼도 탈선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이번에 사고를 낸 KTX 산천은 한국형 고속열차 개발사업의 하나로 1996년 개발작업이 시작됐다. 2007년 설계가 완료된 뒤 지난해 3월께부터 실제 운행에 투입돼 현재 19편성(190량)이 가동되고 있다. 한국철도기술연구원 김기환 박사는 “차체 결함 가능성은 매우 작지만 휠이 마모하거나 또 다른 전자제어장치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KTX 산천을 개발한 현대로템은 미국과 브라질 등 고속철도 시장 진출을 위해 지난해부터 수출 상담을 벌이고 있다.
장정훈 기자
◆컨트롤박스(레일밀착쇄정장치)=선로전환기에서 신호를 받아 레일이 움직이도록 동력을 전달하는 장치. 컨트롤 박스 안에는 레일을 실제로 좌우로 움직이는 모터와 전기장치가 들어 있고, 이들 부품을 제어하는 컨트롤러가 장착돼 있다.
◆선로전환기=열차가 한 선로에서 다른 선로로 바꿔 타거나 이동할 때 사용되는 철도설비. 철도는 핸들을 조종해 몸체인 객차를 좌우로 돌릴 수 없기 때문에 올라탄 선로만을 달리게 된다. 그래서 다른 선로로 바꿔 탈 때는 선로전환기를 이용한다.
